자녀 2명을 출가시킬 때까지 이렇게 많은 액수를 적금 등에 넣기가 쉽지 않았지만 노후를 생각해서 다소 무리를 한 것. 비상금 성격으로 몇 천 만원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그는 일을 그만둔 뒤 친구들과 1년에 두 세차례 부부 동반으로 동남아로 골프여행을 간다. 자녀들이 가끔씩 용돈을 주지만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 젊어서부터 은퇴 이후를 준비한 덕분에 스스로 여유 있게 지내는 편이라 생각한다.
5년 전 남편을 여읜 유모씨(66). 월 30만원 안팎의 유족연금으로 생활하기가 빠듯해 기회가 닿는 대로 파출부 일을 찾는다. 자녀 4명이 조금씩 용돈을 주지만 부담스럽기는 서로가 마찬가지다.
둘째딸 내외와 함께 사는 것이 편치 않아 서울 근교의 실버타운에 들어갈까 생각해 봤지만 입주 보증금이 최소한 1억원을 넘고 월 생활비가 70만원 이상이라는 얘기에 꿈도 꾸지 못한다.
유씨는 “노후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 아파트를 처분해서 자식들에게 일찍 나눠준 것이 후회된다”고 한숨짓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해야 겨울을 따뜻하게 보낸다는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할 때 늦어도 가을(50대 후반)까지 겨울(60대 이후)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추위와 배고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보장에 기대면 곤란=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석재은(石才恩) 책임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평균 소득은 월 104만2000원. 연령이 많을수록 소득이 줄어들어 65∼69세는 143만400원, 70∼74세는 79만5000원, 75∼79세는 65만6000원, 80세 이상은 58만4000원이다.
전체 노인의 20%는 소득이 최저생계비(1인 35만5774원)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가 도시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노인이 많이 사는 농어촌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노인이 최저생계비보다 적은 액수로 지낸다는 얘기다.
문제는 노인 스스로 일을 하거나 자녀로부터 지원 받아 마련하는 소득이 전체의 87%를 차지하고 국민연금이나 정부의 생계비 보조 등은 13%가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가입자가 노령이나 질병, 사망 등으로 인해 소득능력이 상실 또는 감퇴되었을 때 본인이나 유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지만 지급액이 퇴직 전 소득의 3분의 1이 채 안 돼 노후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이 노인 소득의 절반 이상을 연금 등에서 지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찍 준비할수록 유리하다=외환은행 오정선 재테크팀장(서울 종로구 평창동지점)은 “최저생계비도 감당하지 못하는 국민연금은 노후 대책이 될 수 없으므로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보장체계가 취약하므로 본인 스스로 노후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늙어서 안락하기는커녕 기본적인 생활수준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
현재 35세 직장인이 퇴직(65세) 이후 15년을 아내와 같이, 그 이후 7년은 아내 혼자 산다고 가정해 보자. 월 생활비를 70만∼100만원으로 잡으면 모두 1억9800만원이 필요하다(신한은행 한상언 재테크팀장).
이 돈은 현재 기준으로 추정하는 것이어서 물가 상승을 감안한 은퇴 시점의 금액은 6억4200만원이 된다. 이런 목돈을 한꺼번에 마련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가능한 한 일찍 노후에 대비해서 재테크에 신경써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 팀장은 “노후 준비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은데 특히 질병이나 사고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기본적인 생활비 이외의 자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은행 정의범 과장(서울 강남구 로얄프라자 대치동 지점)은 “20, 30대에는 적은 금액이라도 꾸준히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고 40, 50대에는 개인연금신탁 등의 연금식 상품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보장성 보험상품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스위스의 연금제도▼
스위스 제네바의 노인요양시설에서 근무하는 캐롤 뷰쇼씨(여). 프랑스 출신으로 2년 전부터 제네바에서 살고 있다. 그녀가 받는 월급은 6702.20스위스프랑. 우리 돈으로 약 600만원이다. 이 중 1083.05스위스프랑(약 96만9300원)이 연금 및 건강보험료 등으로 나간다.
가장 많이 공제되는 것은 기초연금 보험료. 봉급의 5.04%를 내야 한다. 사고에 대비한 장애 보험료는 1.31%, 해직수당을 받기 위한 보험료는 1.25%,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할 때 봉급을 100% 보장하는 질병수당 보험료는 1%.
여기에다 연간 소득이 2만5000스위스프랑을 넘을 때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소득연계연금 보험료로 한 달에 약 300스위스프랑을, 건강 보험료로 200스위스프랑을 낸다. 임신 출산과 관련된 보험도 따로 있다.
부쇼씨는 “여러 종류의 보험료를 내고 소득세를 납부해야 하므로 노후를 생각해 따로 돈을 모으기 힘들지만 은퇴 이후에 현재 월급의 80%를 연금으로 받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위스는 1946년에 기초연금제도(노령연금과 유족연금)를, 1982년에 소득연계연금제도를 도입했다. 노령연금은 가입자가 65세(남자) 또는 63세(여자)가 됐을 때 지급한다.
기초연금 지급에 필요한 기금은 가입자가 내는 연금 보험료와 연방정부 및 주정부의 보조금으로 마련한다. 노령연금의 경우 연방정부가 지급액의 16.36%를, 주정부가 3.64%를 지원한다.
소득연계연금은 개인계좌에 적립된 기금의 7.2%에 이자를 곱한 금액을 은퇴 이후 해마다 지급한다. 지급시기는 기초연금과 같다.
기초연금과 소득연계연금 등 사회보장제도 덕분에 스위스의 노인들은 은퇴 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수입이 생겨 노후에 대비한 재테크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떼는 만큼 돌려주는 것이다.
제네바=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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