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⑩'DJT공동정권' 산파 박태준의 몰락

  • 입력 2003년 3월 5일 19시 20분


박태준 전 국무총리는 DJT 공동정권의 한 축으로 김대중 정부 출범에 기여했으나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 상태에서 터진 명의신탁 파문으로 4개월 6일 만에 총리직에서 낙마하는 불운을 겪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는 DJT 공동정권의 한 축으로 김대중 정부 출범에 기여했으나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 상태에서 터진 명의신탁 파문으로 4개월 6일 만에 총리직에서 낙마하는 불운을 겪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직접 불러 ‘같이 일하기 어렵게 됐으니 그만둬 달라’고 할 일이지 여기저기 신문에 나게 하다니….”

2000년 5월18일 저녁. 조간 가판신문에 자신의 부동산 명의신탁과 관련한 구설수가 ‘박 총리 투기 의혹’이란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됐다는 보고를 받은 박태준(朴泰俊·TJ) 국무총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그때 박준영(朴晙瑩)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으로부터 총리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해명자료를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TJ는 “해명할 것도 없고 해명할 필요도 없다”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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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보도 경위를 이미 ‘음모’로 파악하고 있던 TJ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문제의 사건은 TJ가 1988년부터 93년까지 5년여간 조모씨 명의로 6건의 부동산(매입가 58억원)을 사들인 뒤 조씨 명의로 임대사업을 해온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로서는 명의신탁이 불법이 아닌데도 93년 김영삼(YS) 정권 출범 직후 관할세무서는 “증여세 회피 목적이 있다”는 이유로 조씨에게 20여억원의 증여세를 부과했고 조씨는 세무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이었다. TJ는 이를 92년 대선 때 도와달라는 YS쪽의 요청을 거부한 데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법원이 증여세 일부를 돌려주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는데도 이 사실이 투기 의혹으로 신문에 보도되자 TJ측은 권력 핵심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확신했다.

TJ는 다음날인 5월19일 아침 청와대 대통령집무실로 김대중 대통령(DJ)을 찾아가 사표를 내밀었다. 그러나 DJ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TJ는 “이미 DJ가 모두 보고를 받은 상태에서 시작한 일인데 무슨 할 얘기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청와대를 나온 TJ는 곧바로 비서진에 총리공관 철수를 지시했다.

물론 당시 ‘음모론’에 대한 TJ쪽의 확신에 대해 여권 핵심관계자들은 ‘터무니없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민주당 한광옥(韓光玉) 최고위원의 증언.

“TJ 자신도 소송이 걸려 있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갑자기 언론에 이 문제가 등장하자 오해를 한 것 같다. 박 총리는 청와대가 정보라인을 통해 이미 사건이 진행 중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에게 귀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청와대도 사건이 나고서야 허겁지겁 알아봤을 뿐이다. 김 대통령의 박 총리에 대한 신뢰감은 컸으나 여론의 반발이 심상치 않아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TJ가 음모를 확신하게된 데는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운 여러 징후가 있었다.

우선 인사와 이권문제에서 차기 대권구도 문제에 이르기까지 동교동계가 자신을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다고 TJ는 확신하고 있었고 그를 뒷받침할 만한 정황도 적지 않았다.

TJ의 한 측근은 “TJ는 취임 이후 집권 실세들로부터 들어오는 민원과 인사청탁, 특히 포항제철과 관련한 많은 부탁을 모두 차단했다”며 “이로 인해 원성이 높아졌고 TJ가 대권에 욕심을 두고 이미지 관리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DJ에게 올라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 무렵 여권에서는 민주당에서 뚜렷한 대권주자가 부각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지명도가 높고 영남권에 기반을 둔 TJ가 민주당 대권주자로 나서면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보고서가 나돌기도 했다.

당시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막대한 자금동원력이 있는 TJ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경우 DJ의 노선과 정체성을 계승하는 후보가 고전할 수 있는 만큼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내부 의견이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TJ의 명의신탁 관련 보도가 정교하게 ‘사전기획’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권 내부의 분위기가 TJ 문제의 ‘사후 처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 인사의 증언 요지다. 일부 관계자들은 “TJ가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자민련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내의 친분 있는 일부 의원들에게까지 나름의 ‘성의’를 표시한 데다 정부 산하기관의 요직에 호남인맥이 대거 포진한 것을 문제삼기도 했다”며 “이 같은 행동은 여권 핵심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 상황론을 펴고 있다.

더욱이 TJ는 자민련 김종필(金鍾泌·JP) 명예총재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실제 JP는 이 문제가 불거진 뒤 TJ를 위해 전혀 애쓰지 않았다는 게 JP의 측근들과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에 대해 JP의 한 측근은 “총리 취임 이후 TJ는 자민련에 일절 재정적인 도움을 준 일이 없다. JP와 별도로 만난 적도 없다. JP로서는 TJ를 보호하거나 동지의식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TJ가 자민련의 기반세력인 충청권 의원들의 이해보다 공동여당간의 이해 조정에 더 관심을 가진 것처럼 비친 것도 그의 당내 입지를 좁히는 요인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DJ의 집착이 컸던 중대선거구제 문제. TJ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면 자민련이 호남과 영남에서 당선되는 지역이 늘어나 당세 확장의 전기가 될 수 있다며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적극 찬성했다.

TJ는 실제로 중대선거구제 도입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99년 조영장(趙榮藏) 총재비서실장을 시켜 1억원을 들여 유명 여론조사기관에 지역별 당선 가능성을 분석하도록 의뢰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자민련 공천만 받으면 편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충청권 의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공천 과정에서부터 내부 갈등이 심화돼 당이 분란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 반대 논리였다.

그 뒤 TJ는 중대선거구제가 무산되자 대안으로 민주당과의 연합공천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JP와 충청권 의원을 중심으로 한 자민련 내 주류세력은 이미 독자적으로 총선을 치르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TJ의 한 측근은 “민주당과의 ‘협력’에 매달리는 듯한 TJ의 태도가 오히려 JP의 견제심리를 자극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DJT정권의 한 축을 이뤘던 TJ는 좁은 당내 입지에다 여권 핵심부와의 미묘한 갈등이 겹치면서 무기력하게 낙마한 뒤 DJ는 물론 JP와 인연을 끊었다. TJ는 이후 DJ, JP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직도 이들간의 화해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자민련 출신의 한 중진정치인은 “TJ는 3김처럼 독자적 지역기반을 갖추지 못한 데다 정치력도 부족했다”며 “닥쳐올 총선과 대선에서 DJ와 JP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고용사장’의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유상부 회장과의 불화▼

유상부(劉常夫) 포스코(옛 포항제철) 회장은 당초 ‘박태준(TJ) 사단’의 핵심 멤버였으나 TJ와 관계가 불편해졌다.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崔圭善)씨의 권유로 2001년 4월 포스코 계열사와 협력사들이 타이거풀스 인터내셔널(TPI) 주식 20만주를 시가보다 고가로 매입하는 것을 막지 못한 데 대한 TJ의 노여움 때문이다.

TJ는 1998년 3월 자신의 추천으로 포스코 회장에 선임된 유 회장이 지난해 5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된 것이 밝혀진 이후 “포스코 34년 역사에 중대한 오점을 찍었다”며 유 회장의 ‘책임’을 끈질기게 추궁하고 있다.

TJ와 뜻을 같이하는 포스코 전 현직 임원 수십명도 지난해부터 유 회장 퇴진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여왔다.

다만 사태가 DJ 정권의 비리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TJ는 원치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TJ측은 “타이거풀스 주식을 산 것이 여권핵심부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해한다”면서도 “다만 큰 조직의 책임자로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 문제”라고 유 회장의 ‘자질’을 문제삼았다.

TJ도 “포스코는 일제강점기 36년간 조상들이 피흘린 대가로 받은 청구권 자금을 밑천으로 우리들이 피땀 흘려 일군 국민기업이다. 아무리 민영화가 됐다해도 정부가 그런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쁜 정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부 일각에서 민영화 의지의 후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유 회장 교체를 위한 물밑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TJ의 분노’를 정권 핵심 인사들이 접수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TJ가 보는 '국민의 정부'▼

DJP 정권의 산파역을 맡았던 박태준(朴泰俊) 전 국무총리는 DJ 정권이 보혁과 동서화합을 이루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서 남북관계를 비롯한 여러 어려움이 초래됐다고 주장했다.

박 전 총리는 최근 기자와 만나 “97년 대선을 앞두고 9월28일 도쿄(東京)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한일전을 관람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DJ와 만났을 때 지지를 호소하며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업적 인정’과 보혁간의 견제와 균형, 동서화합과 포용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업적 인정 외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일방적인 논리로 국정을 몰고 간 것이 DJ 정권의 비극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특히 “임동원(林東源) 당시 국가정보원장에게 ‘아직도 햇볕정책을 이해하지 않는 층이 다수’라는 점을 수시로 강조했으나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2000년 6월부터 대북 비밀송금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박 전 총리는 또 “2000년 3월 싱가포르에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이 북한쪽과 접촉한 것도 (총리인) 나한테는 전혀 얘기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최근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 논란과 관련해서도 “용산 미군기지를 빼낸다면 외국인투자자의 대거 이탈로 증권파동이 일고 나라가 안에서부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는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일본도 반드시 갖게 되고 그러면 중국에도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미국에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25일 중국 국무원 경제고문직에 취임할 예정이다.

이동관기자 dklee@donga.com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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