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나눈 지 꼭 10분. LG홈쇼핑 최영재(崔永載·61) 사장도 종이를 꺼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배석한 홍보팀장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달 21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영등포구 LG홈쇼핑 본사에서 사장 취임 이래 6년 동안 회사를 30배 키운, 한국 1위의 홈쇼핑 회사 사장과 2000년부터 홈쇼핑을 통해 월평균 3, 4건, 많게는 10건 이상을 구입해 온 결혼 7년 차의 30대 주부 이주영씨(34)가 만났다. 둘은 덕담을 주고받기 위해 만난 게 아니었다.》
#대화의 윤활유 ‘칭찬’
“상담원에게 각종 문제점을 자주 지적하신다고 들었습니다.”(최사장)
“예, 아주 편하고 좋아서 자주 이용하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이씨)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씨는 홈쇼핑을 통해 기저귀, 아기용품 등 필요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살 수 있다며 최 사장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반품을 할 때도 환불부터 해 주고, 없는 물건이 없다고 느낄 때, 또 LG홈쇼핑에서 본 물건을 LG이숍(LG홈쇼핑의 인터넷 쇼핑몰)에서 약간 싸게 살 수 있는 등으로 연관 관계를 구축해 놓은 게 참 잘 돼 있어요.”(이씨)
“과찬이세요. 좋은 품질을 알맞은 가격에 팔려고만 했을 뿐….”(최 사장)
#애정 어린 비판과 넉넉한 받아들임
“그런데, 저 불만이 많아요.”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어 갔다.
“배송 서비스가 못마땅해요. 여름철에 냉동·냉장 서비스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음식을 주문하면 걱정돼요. 오는 사람도 들쭉날쭉해 배달원을 가장한 나쁜 사람이 아닐까 불안하고, 어떤 때는 동네 약국에다 ‘나 몰라라’하고 맡겨놓기도 해요.”(이씨)
“배송원이 일정하지 않다고요? 올해부터는 안 그럴 텐데요.”(최사장)
“협력업체가 비용 아끼려고 싼 택배회사만 골라 쓰는 것 같던데.”(이씨)
이 대목에서 최 사장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다소 허둥대는 듯한 모습에서 소비자인 이씨가 이 정도 수준까지 홈쇼핑 시스템을 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허를 찔린 듯 얼굴색이 붉어졌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 안 됐는가 보네.”(최 사장의 혼잣말)
그는 협력업체가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보니 아무리 독려해도 품질, 배송 등이 고객 기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있다고 양해를 구했다. “회사가 급속히 성장하다보니 각종 시스템이 받쳐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는 다소 군색한 변명과 함께.
고객의 날카로운 지적은 이어졌다. 이씨는 업계 1위의 품격에 맞지 않은 과장 광고에도 불만을 토로했다.
“비록 다른 홈쇼핑에 비해 덜 하지만 그래도 상품을 ‘요술방망이’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 같아요.”
평소 ‘백화점 등 오프라인 매장은 직접 보고 샀기 때문에 손님도 50% 정도는 책임이 있지만 홈쇼핑 구매에서 발생한 문제는 100% 홈쇼핑 책임’이라는 지론을 펼쳐 온 최 사장은 “카탈로그에 사장실 직통 팩스번호가 있습니다. 비서를 거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바로 불만 사항을 보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업계 1위로서 시장을 리드해야.
“특히 유사 홈쇼핑에서 이런 과장광고가 심한데, 규제가 안 되나요.”
주제는 자연스럽게 업계 전반으로 흘렀다. 이씨는 LG홈쇼핑이 업계 1위인 만큼 질서 세우기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가받은 홈쇼핑은 단 5개뿐인데, 다른 케이블TV에서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10분 정도 짧게 물건을 파는 유사홈쇼핑들도 스스로를 홈쇼핑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윤리가 없고 오직 이윤만 따지고 있어요.”
최 사장은 폐해에 공감했다. 그 역시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9년 한국전자상거래 및 통신판매협회(KEDMA)의 초대 및 2대 회장을 맡아 윤리규범 제정을 주도했다. 또 유사 홈쇼핑 가운데 최소한의 기준을 통과한 35개 홈쇼핑 회사를 가입시키는 등 자정 노력을 선도하고 있다.
이씨는 과장 광고는 충동 구매를 낳고 가정이 깨지는 극단적 일까지 생긴다고 문제를 짚어갔다.
“저 역시 한때 출산 우울증을 홈쇼핑에서 쇼핑하는 것으로 해소할 정도로 중독 증상이 있었어요. 다행히 가족의 이해로 고비를 넘겼는데 정말 위험했습니다. 주위에서 비슷한 일을 많이 들었습니다.”
경험상 ‘쇼핑 중독’을 개인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게 이씨의 주장. 그는 “고객관계관리(CRM)의 발달로 비이성적인 정도로 한꺼번에 물건을 사는 고객이 체크되는 만큼 이런 고객을 대상으로 한 상담 제도를 운영하는 게 어떠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물건을 파는 곳에서 사지 말라는 상담을 하라’는 역설(逆說)은 호응으로 되돌아왔다.
최 사장은 “충동구매는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하겠습니다”고 약속했다. 그는 바로 배석한 직원에게 “고객들이 좀 더 현명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기분 나쁘지 않게 유도하는 방안을 검토하세요”라고 지시했다.
때로는 상대가 듣기 거북할 정도의 신랄한 비판이 있었지만 고객과 업체 사장간의 격의 없는 대화는 주어진 시간을 훨씬 지나 3시간을 넘겼다.
“고객과의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조만간 강사로 초빙하겠습니다.”(최 사장)
“부족한 말을 많이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더욱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이씨)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LG홈쇼핑 최영재사장 ▼
△1942년 경남 고성 출생
△마산상고, 한양대 화학공학과 졸업
△88년 LG화학 생활용품 사업부 전무
△96년 LG화학 생활건강 CU 사장
△97년 LG홈쇼핑 사장
▼이주영 고객 ▼
△1969년 서울 출생
△동명여고, 동덕여대 전자계산학과 졸업
△92년 헬로우 PC 기자
△99년 초고속인터넷서비스 드림라인 마케팅팀 대리
△2000년 홈쇼핑 이용 시작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