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1부 ⑪국정원 호남마피아 득세

  • 입력 2003년 3월 12일 18시 14분


DJ 정부의 국정원은 호남 출신 인맥이 요직을 장악하면서 급속히 기강 문란에 빠졌다.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때 김대중 대통령(왼쪽)이 이종찬 당시 신임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DJ 정부의 국정원은 호남 출신 인맥이 요직을 장악하면서 급속히 기강 문란에 빠졌다.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때 김대중 대통령(왼쪽)이 이종찬 당시 신임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DJ정부의 국가정보원이 각종 게이트와 인사잡음으로 얼룩졌던 결정적 원인은 인사편중 때문이었다. 특히 국정원 내 ‘호남마피아’의 축을 이뤘던 엄익준(嚴翼駿) 전 차장, 정성홍(丁聖弘) 전 경제과장 두 사람이 뿌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DJ정부 국정원의 실패 원인에 대해 이같이 단언했다.

정보를 다루는 조직의 특성상 엄정한 규율을 생명으로 하는 국정원 조직이 그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인사부터 왜곡되는 바람에 기강이 무너졌고, 필연적으로 각종 스캔들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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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엄익준의 부상 과정은 이런 난맥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북 전주 출신인 엄익준은 97년 대선 당시 안전기획부(99년 1월 국정원으로 개편·이하 국정원으로 통일) 차장의 신분이었지만, 안기부의 내부정보를 DJ측에 빼돌리며 ‘정치권 줄대기’에 앞장섰다.

한 여권 관계자의 증언. “97년 11월 당시 김대중 후보는 동교동 자택 뒤에 별도의 안가를 두고 있었다. 하루는 이곳에 현안을 보고하러 갔는데, 엄익준이 동향인 국민회의 중진 H씨와 함께 DJ 방에서 황급히 나왔다. 엄익준은 두툼한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

엄익준의 행위는 국정원 직원의 정치개입 금지를 규정한 국정원법을 명백하게 위반한 것이었지만, DJ와 동교동계의 입장에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엄익준은 DJ의 대선 승리 후 국정원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가 됐다. 그는 국정원 개편과 운영에 대한 나름대로의 구상을 서류로 만들기도 했다.

대선 후 당시 국정원 내부에서는 직원들의 대선 때 행적 등을 적시한 살생부가 몇 개 나돌았다. 이 가운데 하나는 엄익준측이 작성한 것이라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장 후보로 거론되던 여권 실력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살생부와 국정원 개혁안이 보내졌다. 그 중에는 외부에 나가서는 안될 기밀 사항까지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국정원이 회수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고 말했다.

물론 엄익준의 이 같은 ‘튀는 행보’는 DJ와 동교동계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 DJ정부 초대 국정원장인 이종찬(李鍾贊)의 견제에 부닥쳤다.

이종찬과 가까운 인사의 설명. “DJ는 당초 이종찬에게 ‘엄익준을 차장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이종찬이 반대하자 ‘엄익준은 생명을 걸고 도와준 사람 아니냐’고 다그치기도 했다고 한다. DJ는 이종찬의 후임 국정원장인 천용택(千容宅)에게 ‘내가 엄익준에 대해 이종찬에게 3번이나 얘기를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들었다.”

이에 대해 이종찬 본인은 “차장 인선 협의 과정에서 DJ가 엄익준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엄익준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엄익준은 다른 곳에 쓸 데가 있다’면서 신건(辛建) 전 법무차관을 차장으로 쓰겠다고 했다. 현직에 있으면서 정치권에 줄댄 사람을 요직에 쓰면 국정원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이종찬의 반대에 밀려 엄익준의 국정원 진입은 일단 무산됐다. 하지만 그는 99년 5월 국정원장이 이종찬에서 호남 출신인 천용택으로 교체되자마자 화려하게 국정원에 재입성했다.

엄익준의 기용 과정에 대한 천용택의 설명.

“국정원장에 임명된 뒤 전북 출신 모씨의 소개로 엄익준을 만났다. 얘기를 해보니까 국정원도 잘 알고, 국내 정치인들과의 인간관계도 적절하게 있어 차장으로 괜찮다고 판단했다. DJ와 차장인선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내가 엄익준 얘기를 꺼냈더니 DJ도 ‘잘됐다. 나도 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 자연스럽게 엄익준을 국내담당 차장으로 기용하게 됐다.”

그러나 DJ가 국정원을 천용택-엄익준 체제로 개편한 것은 단순한 인물교체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한 수도권 출신 의원의 설명. “영남 출신인 김중권(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울 출신인 이종찬 국정원장의 존재는 호남 주류인 동교동계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신들의 민원이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동교동계에서는 불만이 팽배했고, 99년 중반이 되면서 결국 DJ도 이들의 목소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종찬에 이어 99년 말 김중권도 교체되면서 여권 권력기관의 요직이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호남인맥으로 채워지게 됐다. 서로 ‘형님’ ‘동생’ 하는 사람들이 각종 요직을 장악하게 되면서 권력기관간의 견제와 균형이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초기 이종찬에 대한 동교동계의 가장 큰 불만은 인사청탁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성홍. 그는 2000년 총선 때 DJ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에게 정치자금 전달을 시도하는 등 각종 물의를 일으키다가 진승현(陳承鉉) 게이트에 연루돼 2001년 12월 구속됐다.

이종찬측은 “정성홍은 구정권에서도 각종 이권 개입설에 연루되는 등 문제가 많아 이종찬 원장 초기에 대기발령을 냈다. 이때 김홍일이 이종찬과 신건에게 수 차례나 전화를 걸어 ‘정성홍을 구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종찬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익준의 경우처럼 정성홍도 이종찬이 교체된 뒤 경제과장으로 복귀했다. 97년 대선 당시 사표를 제출한 뒤 안기부 내부 자료를 들고 국민회의쪽에 가 ‘양심선언’을 하려다 당시 안기부 직원들에게 한동안 구금되기도 했던 김모씨(현 모 도지부 과장)의 복직 과정도 비슷하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김씨는 이종찬 원장 때도 동교동계가 복직을 요구했지만 거부됐다. 그러나 천용택 원장이 들어서면서 한 계급 승진해 복직했다. 비록 양심선언을 한다는 명분이었다고는 하지만 내부 문건을 들고 나가는 등 물의를 빚어 사직했던 사람이 복직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엄익준 정성홍 김씨 등이 DJ측이나 동교동과 특수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이종찬의 사퇴에는 엄익준쪽의 ‘모함’도 한몫했을 것이라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추측이다.

한 민주당 의원은 “엄익준이 국정원 내부 인맥의 정보를 활용해 동교동계 실력자들을 대상으로 이종찬을 집중적으로 비난하고 다닌 것도 이종찬 퇴진을 앞당기게 한 요인 중 하나다. 당시 이종찬이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등의 얘기가 나왔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고 설명했다.

아무튼 이종찬이 퇴진하고 천용택-엄익준 라인이 들어서면서 국정원은 급속히 호남 출신 위주로 재편됐다.

이종찬과 가까운 한 국정원 관계자의 증언. “사실 이종찬이 엄익준 차장에 반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국정원의 호남 편중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종찬이 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국정원 내 지역균형이 엄익준이 등장한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엄익준은 후에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된 김은성(金銀星) 전 차장을 대전지부장에서 대공정책실장으로 발탁하는 등 국정원 요직을 호남 출신으로 채웠다.”

김은성과 정성홍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국정원 내 호남 출신 인맥은 서로 비호하면서 ‘견제’할 세력이 없는 독주를 계속했다. 이들은 동교동계에 직접 정보를 제공하는 등 권력에 줄을 대는가 하면 각종 이권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내부에서부터 부패하며 자멸했다. 이 같은 상황은 DJ의 ‘눈’과 ‘귀’가 가려지기 시작한 것과도 궤(軌)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게이트 뒤에는 반드시 엄익준▼

엄익준(嚴翼駿·2000년 5월 작고·사진) 전 국가정보원 국내담당차장은 주요한 정치적 사건 때마다 자주 이름이 오르내렸다.

2001년 말 ‘진승현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엄익준은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인 10여명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토록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1999년 말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해서도 DJ의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씨의 보물 발굴사업 현장에서 해군이 탐사작업을 하도록 이수용 당시 해군참모총장에게 지원 요청을 한 사실이 특검 수사 결과 확인되기도 됐다.

‘윤태식 게이트’ 수사과정에서는 그가 2000년 2월 경찰에 ‘수지 김 살해 사건’을 은폐하도록 지시한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당시 김승일(金承一)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은 “엄익준으로부터 ‘경찰이 사건을 공개하면 곤란하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엄익준의 ‘권력지향’은 DJ정부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과거 영남 정권에서도 엄익준은 권력줄타기를 했다.

한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엄익준은 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이동복(李東馥) 대변인의 훈령조작 사건에 가담한 장본인 중의 한 명이다”고 말했다. 훈령조작 사건은 고위급회담 대표에게 보내는 서울 안기부의 훈령을 왜곡 전달함으로써, 회담을 결렬시키고 결과적으로 대북 긴장분위기를 조성해 물의를 빚었던 사건. 당시 엄익준은 국무총리 보좌관 자격으로 대표단을 수행했다.

DJ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임동원(林東源)씨가 국정원장에 취임할 때 내가 엄익준의 이 같은 과거행적을 지적하면서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으나 임동원은 엄익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엄익준은 김영삼 정부 때는 ‘나는 원래 충북사람인데 부친이 사업 때문에 전주에서 생활하는 바람에 나도 전주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고 덧붙였다.엄익준은 간암으로 투병하다 작고하기 직전인 2000년 4월 7일 국정원 차장직을 사직하면서 “국정원 직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명감이며 개인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요지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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