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을 앞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그러나 당시 DJ측은 금강산 관광을 통해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DJ의 가장 큰 경쟁자로 판단하고 있었다.
여권 관계자 A씨의 설명.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한 현대는 노벨평화상과 본래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1997년 당시 정 명예회장은 대통령선거에 다시 나설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만류하는 과정에서 가족회의에서 ‘대통령보다 더 좋은 노벨상을 받게 해주겠다’는 말이 나왔고, 실제 현대는 내부적으로 ‘정주영 노벨상 수상 추진위원회’같은 것을 만들어 뛰었다고 한다. 98년 정 명예회장이 소떼를 끌고 방북한 것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이벤트라고 들었다. 현대가 대북사업에 그토록 집착한 이면에는 노벨상이라는 요소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는 얘기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현대의 그 같은 움직임이 남북정상회담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에 앞서 실제 99년 말경에는 ‘정 명예회장이 노벨상 수상을 목적으로 국내외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비선(비線) 보고서가 청와대에 전달되기도 했다.
그러나 DJ측의 이 같은 판단은 실제로는 기우였다. DJ측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직간접으로 기울인 노력이 엄청나기도 했지만, 노벨상에 대한 DJ의 집착을 감지한 현대측이 이때는 이미 노벨상 프로젝트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A씨는 이와 관련해 “현대는 98년말 이후 정 명예회장의 노벨상 수상 추진을 포기하고 이를 대북사업 협의 파트너였던 국가정보원에 인계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정원의 전직 관계자 C씨는 “DJ정부 초기 현대가 DJ의 노벨상 수상을 돕겠다고 제안했으나 인적 네트워크 등이 부실해 도움될 수준이 아니었던 것으로 들었다. 현대와 국정원의 관계는 그것이 전부다”며 노벨상 수상을 둘러싼 국정원과 현대간의 직접적인 커넥션을 부인했다.
그러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국정원이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조직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특정 라인을 통해 부분적으로 간여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98년8월 신설된 국정원 대외협력보좌관에 임명된 DJ의 전 공보비서 김한정(金漢正·전 대통령부속실장)은 노벨상 로비 추진의 핵이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 B씨도 “이종찬(李鍾贊) 전 원장 재임 기간(98년 초∼99년5월) 중에 국정원이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이종찬 자신도 노벨상 수상 자체를 도우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종찬의 설명. “김한정이 노르웨이에 다니고 하는 가운데 동교동측과 접촉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노벨상 얘기가 나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노벨상과 관련되는 일을 국정원에서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 이를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쪽으로 넘기고 김한정도 FDLAP로 내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유명무실하던 FDLAP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한승주(韓昇洲) 전 외무장관을 99년 3월 이사장으로 영입하고 이사진을 개편토록 했다. 그 당시 나로서는 솔직히 DJ가 노벨상을 받는 데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2003년2월 인터넷을 통해 DJ의 노벨상 로비 배경을 폭로한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金基三·40)의 증언은 국정원의 역할이 좀 더 컸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98, 99년 당시 국정원에는 김한정을 중심으로 노벨상 프로젝트팀이 있었으며 여기서 DJ 관련 저술을 번역하고 관련 인맥을 접촉하는 등 노벨상 수상 지원 활동을 했다”며 “이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L국장 등 일부 국정원 직원이 나중에 해외 공관 대사로 영전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김기삼은 당시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한정과 6개월을 같은 방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이는 직접 목격한 사실”이라며 자신의 증언의 신빙성을 거듭 강조했다.
실제 한 국정원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은 DJ의 저술을 북유럽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홍보물 제작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국가원수에 대한 홍보작업이라고 하지만 DJ의 노벨상을 염두에 둔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부 기업이 홍보물 제작 비용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 정치권 안팎에서는 국정원이 노벨상 지원을 위해 상당액의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여권 일각에서는 ‘학자 출신 M씨가 노르웨이 현지 인맥과 접촉한다는 구실로 국정원 돈을 받아 실제로는 집을 사는 데 쓰는 등 개인적으로 챙겼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김한정이 국정원 재직 시절 노르웨이를 오가는 데 여비를 쓴 것을 두고 국정원 돈을 썼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다른 돈을 쓴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DJ측은 지금도 노벨상 로비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나 직간접 로비 활동으로 볼 만한 작업은 98년 이후 물밑에서 활발히 진행됐다.
이런 작업은 공교롭게도 DJ 집권 후인 98년5월 당시 국민회의 총재보좌역이던 최규선(崔圭善·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수감 중) 미래도시환경 대표가 98년 5월 작성한 ‘M 프로젝트’와 ‘블루카펫 프로젝트’의 내용과 거의 똑같이 진행됐다. 이 문건의 골자는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외국 인맥 활용, 남북정상회담 같은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DJ 노벨상 수상 지원 활동은 김한정을 고리로 이뤄졌다. 그 단초는 98년 말 한반도 비무장지대에서 평화콘서트 개최를 위해 방한한 노르웨이 인권단체 ‘월드 뷰 라이츠’의 헤르스 비크 사무총장과 김한정의 만남. 김한정은 당시 비크를 영접, 비무장 지대 답사 작업 등을 안내했다. 결국 비무장지대 평화 콘서트는 무산됐지만 김한정과 비크는 그 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월드 뷰 라이츠의 비무장지대 평화콘서트 구상과 관련,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최규선의 노벨상 프로젝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우리가) 추진한 것이다”고 했으나, 김한정은 “월드 뷰 라이츠측이 요청해왔다”고 엇갈린 증언을 했다.
월드 뷰 라이츠는 노르웨이 내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노벨위원회와 계약을 하고 매년 노벨상 수상식 때 축하 공연을 기획, 실행하는 등 노벨위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단체. 여기에다 비크는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2000년 12월 DJ의 노벨상 수상 축하 공연 때 즉석에서 미국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클린턴 대통령에게 축하메시지를 보내도록 요청할 만큼 국제적인 인맥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월드 뷰 라이츠는 비무장지대 음악회 대신 2000년 10월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당시 음악회를 공동 주관한 FDLAP측이 국내 대기업에 음악회 후원을 할당했다느니, 수익금의 용처가 불분명하다느니 하는 구설이 나돌았다.
아무튼 비크는 동티모르와 미얀마 민주화에 대한 지원 아이디어도 DJ측에 귀띔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한정은 이어 99년 7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웅산 수지 지원을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해호세 라모스 오르타 현 동티모르 외무장관(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을 만난다. 이후 김한정이 이해 12월 그와 함께 동티모르를 방문한 이후 DJ는 동티모르 독립과 미얀마 민주화에 대한 본격 지원에 나선다. 이 같은 내용은 모두 DJ의 노벨상 수상 공적에 포함됐다.
▼'노벨상 프로젝트 주역' 지목된 김한정▼
김한정은 88년 평화민주당 시절 설훈(薛勳) 의원의 소개로 DJ 비서로 입문했다.
97년 대선기간에 미국 럿거스대에서 유학중이던 김한정은 대선 직후 귀국해 DJ정부에서 역할을 모색하던 중 배기선(裵基善) 의원의 소개로 이종찬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과 알게 됐다.
이종찬은 “김한정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당시 나는 국가정보원장을 맡으면서 국내외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경제정보 수집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 김한정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대외협력보좌관으로 채용했다”고 말했다.
김한정이 ‘월드 뷰 라이츠’의 헤르스 비크 사무총장을 알게 된 것도 국정원에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국정원 내에서는 그가 대통령부속실장이란 요직에 갑자기 발탁된 것도 노벨상 수상의 논공행상이란 얘기가 정설처럼 돼 있다.
김한정은 99년 6월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사무총장을 거쳐 그 해 12월 대통령부속실장으로 옮긴 이후에도 국정원 직원을 지휘하며 노르웨이 주요 인사의 방한을 주선하는 등 DJ 노벨상 수상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이다.
실제로 김한정은 국정원 근무 시절부터 노르웨이를 ‘빈번하게’ 드나들어 여권 내에서도 의구심 섞인 시선을 받았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김한정 당시 대통령부속실장이 동티모르 독립기념관 건립 지원 등을 얘기하기에 ‘주제넘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한정은 “내가 동티모르 문제 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인권 외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장의 실리외교만 따지는 정부 관계자들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노벨상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해다”고 말했다.
김한정은 현재 퇴임한 DJ의 비서관으로 동교동에 출근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 장=이동관 정치부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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