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국민의 정부]1부 ⑭국정원장 천용택의 부침

  • 입력 2003년 4월 2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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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12월18일 국가안보 상임회의에 참석한 이종찬 국정원장과 그의 후임 국정원장이 될 천용택 당시 국방부장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가운데는 강인덕 당시 통일부 장관. -박성원기자
98년 12월18일 국가안보 상임회의에 참석한 이종찬 국정원장과 그의 후임 국정원장이 될 천용택 당시 국방부장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가운데는 강인덕 당시 통일부 장관. -박성원기자
1999년 5월. 새로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한 천용택(千容宅)은 취임하자마자 ‘국정주도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시는 ‘옷로비 사건’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던 상황.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의 ‘마녀사냥’ 등 언론에 대한 비판 발언이 상징하듯 정권 핵심부의 언론에 대한 불만은 폭발 일보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 천용택이 국정원장 취임 후 추진한 첫 작업은 바로 언론단 창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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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용택 체제의 국정원 지도부는 정부관계부처의 언론관계자회의를 소집했다. 국정원 지도부는 일단 언론에 ‘당근’을 주되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으면 ‘채찍’을 든다는 기본방침을 정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 “천용택의 전임자인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은 국내담당 차장 산하 언론지원과 인원 10여명을 이관받아 공보관실을 창설했다. 국정원의 홍보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다. 천용택은 그 인원을 다시 국내담당 차장 산하로 복귀시켰다. 언론단 창설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이 작업의 실무는 천용택과 함께 국정원에 입성한 엄익준(嚴翼駿) 당시 국정원 차장이 주도했다. 엄익준은 국정원 밖에서 그 같은 개편 플랜을 짜 갖고 들어왔다.”

그러나 은밀하게 추진됐던 언론단 창설 추진 작업은 동아일보에 그 내용이 사전에 보도되면서 ‘언론통제용’이라는 거센 비난을 샀고 결국 유야무야됐다.

의문점은 천용택이 충분히 예상되는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언론단 창설이란 무리수를 두어 국정원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도모한 배경이었다.

이에 대해 다른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당시 천용택은 DJ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을 정도로 강력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하루는 천용택이 간부들에게 동교동계 핵심 실세 한 명을 지칭하면서 ‘○○○ 그 사람, 멍청한 ×이다. 대통령이 ○○○은 머리가 나빠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 호언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천용택은 자신감이 넘쳤다”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인 C씨는 “권력 실세인 동교동계의 견제를 받아 활동이 위축됐던 전임자 이종찬과 달리 천용택은 폭넓은 재량권을 가지고 국정 여기저기에 관여했다. 그것은 대통령의 신임도 신임이지만 천용택이 동교동계와 호남 실세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천용택이 언론단 창설을 추진했던 것은 DJ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에서 장관급인 비상기획위원장을 지낸 천용택이 DJ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에 이어 국정원장으로 영전하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C씨는 “천용택은 육군 소장 시절인 92년 대선 때만 해도 DJ를 비난하고 다닌 사람이다. 96년 총선 때 국민회의에 영입됐는데 처음에는 이런 과거 행적 때문에 별로 신임을 얻지 못했다. 천용택이 결정적으로 DJ의 눈에 든 것은 97년 대선 때였다. 당시 대선 승부의 결정적 요인이 됐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를 이슈화한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여기에다 천용택은 윗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스타일이 아니다.”

천용택 본인은 7개월여 만에 뜻밖의 설화(舌禍)에 휘말려 ‘단명’으로 국정원장직을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DJ의 신임을 자신하고 있었다.

천용택은 99년 12월15일 검찰출입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97년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 삼성그룹이 중앙일보 홍석현(洪錫炫) 회장을 통해 DJ에게 정치자금을 보내왔다. 그러나 DJ는 개정 이후에는 받지 않았다”고 발언해 파문을 빚은 끝에 그 해 12월23일 경질됐다.

이에 대해 천용택 자신은 “발언 다음날 청와대에 업무보고차 들어갔을 때 DJ는 ‘국정원장 자리에 있을 때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간단히 질책하고 용서해 줬다. 내가 국정원장을 그만둔 것은 그 후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민주당 당직자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이 당직자는 “DJ가 당초 천용택의 경질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교동계가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교체하게 됐다. 특히 천용택이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DJ의 과거 정치자금을 언급하면서 DJ를 ‘김대중이가’라고 지칭했는데 이것이 DJ를 주군(主君)으로 모셔온 동교동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건방진 행태’로 비쳤다”고 말했다.

언론단 창설은 무산됐지만 천용택 체제가 들어서면서 국정원은 이종찬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견제와 균형’의 건전한 내부 역학관계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 K씨의 설명. “이종찬은 국정원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을 10% 감축하는 등 물갈이를 했다. 그 결과 과거 정권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호남출신이 약진하는 현상도 빚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특정지역 인맥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용택 체제에 들어서면서 이종찬이 임명한 간부들을 거의 다 쳐내고 요직에 엄익준 사단을 포진시켰다. 그 후로 국정원의 호남 간부들이 정치권 실세들과 어울리며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등 기강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원장 외에는 그 내용을 아무도 알 수 없게 돼 있는 국정원 예산의 운용방식도 문제였다. K씨는 “과거에는 예산관과 별도로 지출관을 둬서 예산 사용에 대한 자체 견제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천용택 이후에는 지출 업무를 예산관 밑으로 일원화했다. 예산을 짠 사람이 지출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최소한의 견제장치마저 없어진 셈이다”고 말했다.

그는 “본래 국정원 예산은 원장의 성역으로 간주되는 게 현실이다. 내부감사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 감사관실이 예산에 대해 감사를 하려고 하면 ‘당신들 목이 몇 개나 되느냐’는 으름장을 듣게 되는데 감사가 이뤄질 수 있었겠느냐”고 설명했다.

엄익준의 주도 아래 인사의 ‘호남 편중’ 현상이 심화되면서 한때 감찰실 인원의 절반 이상이 호남 출신으로 채워져 감찰기능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그 결과 국정원 간부들의 각종 ‘게이트’ 연루로까지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정원이 ‘정치지향’의 색채를 띠면서 정보수집이란 본래의 기능보다 ‘햇볕정책’이란 정권홍보 논리에 몰두한 것도 대략 이때부터 본격화된 현상이라는 게 관련자들의 증언이다.

국정원의 한 고위관계자도 “외국 정보기관 사람을 만나면 ‘국정원 사람들은 온통 햇볕정책 홍보에 바쁘다’며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내곤 한다. 정보기관이 정보수집은 하지 않고 정권의 눈치만 본다는 얘기인데 정말 낯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해외 정보를 담당했던 한 실무자는 “국내 정치파트 요원이 득세하는 풍토가 되면 해외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걸고 정보를 수집할 사람이 없어진다. 본부 사무실 근무 요원을 최소화하고 일선 현장을 뛰는 정보맨들을 집중 육성, 우대할 때 국정원이 제대로 된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사자의 변▼

본보 3월20일자 ‘국민의 정부 비화’ 기사 중 해외담당 차장 산하 P국장이 이사관(2급)으로 승진한 지 9개월 만에 1급 보직인 국장 자리를 맡아 내부 잡음이 있다는 내용과 관련해 국정원측은 P국장에 대한 인사는 국정원 인사규정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알려왔습니다.

▼뒤통수 맞은 이종찬 前원장▼

99년 10월25일.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폭로한 ‘언론 문건’은 여야 공방은 물론, 여권 내부에서도 도·감청 및 정치사찰과 관련해 첨예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공개된 언론 문건에는 언론사에 대한 관계기관 내사 등 정권의 언론장악 시나리오가 담겨 있었다. 당연히 누가 문건을 만들었느냐가 공방의 초점으로 떠올랐고, 한나라당측은 이종찬(李鍾贊)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를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결국 이 문건은 중앙일보 베이징(北京)특파원이던 문일현(文日鉉) 기자가 작성해 6월23일 이종찬의 사무실에 팩스로 보냈고, 그후 평화방송 이도준(李到俊) 기자가 이종찬의 사무실에서 훔쳐 정형근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국정원측이 전 국정원장인 이종찬을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국정원장은 천용택(千容宅)이었다.

이종찬과 가까운 한 민주당 인사 K씨의 설명. “사건 초기만해도 이종찬은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용택 쪽에서 ‘베이징에서 팩스 온 것이 있을 테니 찾아 보라’고 귀띔해 주어 비로소 팩스 기록을 찾게 됐다. 국정원이 이종찬에 대해 감청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종찬은 당시 국정원이 자신을 감청했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국정원장 출신으로 이 얘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어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언론 공작을 기획한 장본인으로 오해를 받았다.

K씨는 “당시 국정원은 문일현과 중앙일보 간부의 국제전화 통화내용을 도청한 녹음테이프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종찬이 문건작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국정원측은 처음에 이 자료를 이종찬측에 줄 것처럼 말했다가 나중에 번복해 이종찬이 더욱 난처한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측은 지난해 한나라당이 기자와 정치인들간의 통화내용을 담은 ‘국정원 도청자료’를 폭로한 뒤에도 도·감청 사실을 부인했으나 적어도 전직 국정원장의 사무실을 감청한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게 된 셈이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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