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신뢰경영]2부<1>"부도덕 기업 추방"

  • 입력 2003년 4월 3일 19시 33분


《지구촌에서 기업의 비중과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기업이 단지 이익만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사회의 건강한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기업 시민(Corporate Citizenship)’ 개념이 확산되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서 기업의 윤리와 투명성, 사회적 공헌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주요 대기업은 스스로 ‘윤리적 이니셔티브’를 확보함으로써 사회의 신뢰를 선점하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기회에 우리 기업의 고질적 폐해로 지목돼 온 정경유착, 주주 무시, 이사회 기능 부재, 분식회계, 경영 불투명, 총수 독단, 선단(船團)식 경영 등을 청산하고 투명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 유럽 일본의 기업과 경제계에 대한 직접 취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세계의 큰 흐름을 들여다본다.》

미국 동부의 대학도시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30분 떨어진 월담에는 벤틀리대가 있다. 시골의 작은 대학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 대학에 있는 ‘기업윤리센터(Center for Business Ethics)’ 덕분이다.

1976년 설립된 이 아담한 연구소가 미국 경제계에 ‘기업윤리’를 전파해온 진원지다. 이 연구소에서 미국 920여개 주요 기업들의 윤리 담당 임원들로 구성된 ‘미국윤리임원협의회(EOA)’가 출범했고, 미국 기업들의 윤리경영 확산에 분수령이 된 ‘기업범죄에 대한 연방판결지침(FSGO)’의 기초가 마련됐다. 최근에도 유럽 일본 중국 영국 캐나다 남미 등에서 매년 3, 4명씩의 전문가들이 방문교수로 참여해 기업윤리에 대한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비(非)윤리적인 기업과는 협력 않는다=최근 EOA는 윤리경영 표준안(BCMSS·Business Conduct Management System Standard)을 만들어 이를 국제 표준화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EOA가 마련한 BCMSS는 현재 미국 표준기구(ANSI)의 지원을 받아 국제표준기구(ISO)에 제안된 상태이며 2년 안에 국제 표준 인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 증권거래소(NYSE)는 이미 새로 상장하는 기업들의 조건으로 이 BCMSS의 일부를 채택했다. 국제 표준안이 마련되면 주요 대기업들은 이를 채택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을 것이며, 각국 정부가 관련법을 제정할 때도 기초가 될 것으로 EOA측은 전망했다.

EOA 집행이사 에드워드 페트리는 국제 표준을 만들려는 이유에 대해 “기업 활동이 글로벌화되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만 적용해서는 효과가 없다”며 “미국 기업들이 비즈니스 파트너를 정하는 데도 이 기준이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EOA는 세계은행, 유럽 기업윤리연합(CEA-CED), 일본 기업윤리연구센터(BERC) 등과 연대해 기업윤리시스템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강화되고 넓어지는 윤리 개념=페트리 이사는 미국의 새로운 FSGO가 10월경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판결기준은 EOA의 윤리기준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며 “그러나 엔론 사태가 터진 이후 최고경영진의 범죄행위가 도마에 오르자 이사회 강화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포함한 새로운 판결지침이 마련되고 만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NYSE와 미국 연방판결위원회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1991년 제정된 FSGO는 미국 법원이 기업범죄를 재판할 때 ‘기업이 윤리시스템을 잘 갖추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형을 감면해주는 제도. 미국 기업들에 윤리경영을 확산하기 위한 일종의 인센티브다. 만일 제도를 갖추지 않았거나 제도가 있더라도 실제로 기업을 윤리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중형을 면치 못한다. 스위스 제약회사 하프만-라로시는 윤리경영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1999년 5억달러의 벌금을, 독일 바스프는 2억5000만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페트리 이사는 “최근 미국 주요 기업들은 사회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신뢰를 잃었다면 왜 잃었는지 자체적으로 점검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작년에 기업개혁법인 사베인스-옥슬리법이 통과된 후 NYSE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후속 조치들을 계속 내놓고 있으며 1년 후에는 대부분의 규정들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기업들은 정부와 금융당국의 규제 이전에 먼저 윤리적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경주에 돌입했다는 것이 EOA측의 설명이었다.

보스턴=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국제기구 지침 잇따라 발표▼

기업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이 세계 경제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표준기구(ISO)와 미국 920개 기업들로 구성된 윤리임원협의회(EOA)는 기업의 ‘윤리경영 표준안(BCMSS)’을 2년 안에 국제 표준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표준안은 △기업이 윤리강령을 갖추고 △윤리담당자를 두며 △윤리교육을 실시하고 △내부부정 적발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등을 뼈대로 한다. 국제표준이 채택되면 세계 각국의 주요 기업들은 윤리경영 시스템을 갖추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윤리 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고 있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의 투자자들은 2001년 윤리적으로 검증된 기업의 채권과 주식에 대한 투자를 촉구하는 단체 ‘EOROSIF’를 설립했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윤리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에만 투자하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투자(SRI) 펀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01년 CSR에 관한 ‘그린 페이퍼(綠書)’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기업의 신뢰성과 투명성의 중요함, 공동체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활동, 환경현안 및 소비자보호, 중소기업에서의 CSR 추진 등을 밝히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비중이 점점 커짐에 따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투명성기구(TI),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들도 1990년대 말부터 ‘다국적 기업에 관한 지침’ ‘국제상거래상의 뇌물방지협약’ 등을 발표하고 기업들의 준법과 윤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1999년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글로벌 콤팩트’를 주창했다. 이후 글로벌콤팩트는 유엔 프로그램의 하나로 세계 30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700여개 기업들이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WTO는 1996년 정부조달의 투명성 협정을 체결했으며 OECD는 1997년 국제상거래에서의 뇌물방지 협약을 체결했다.

2001년 OECD가 발표한 ‘다국적 기업에 관한 지침’은 회원국 정부와 기업, 사회단체 등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지침은 기업공개, 고용, 노사관계, 환경, 부정부패 방지, 소비자 보호, 기술개발, 경쟁 등 광범한 분야에서 기업들의 윤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보스턴=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브뤼셀=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美기업윤리센터 호프만 소장▼

“윤리적으로 경영하지 않는 기업은 언제든지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기업들이 윤리경영을 새로운 사업 기회로 여기고 앞장서 나간다면 투자자와 소비자의 신뢰라는 더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벤틀리대 기업윤리센터 마이클 호프만 소장(사진)은 “미국 사회는 최근 잇따른 회계부정 사건으로 인해 기업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최근 분식회계 적발이 많아진 것은 분식회계 자체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기업윤리에 대한 요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윤리와 관련해 현재 미국 경제계에서 가장 큰 이슈는 △기업지배구조 △회계 성실성 △윤리프로그램 마련 등 3가지라는 설명. 호프만 소장은 최근 미국 정부와 금융감독 당국이 기업윤리와 투명성을 강화하는 제도를 잇따라 도입하고 있지만 제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경영자와 임직원에 체화된 윤리성(ethical integrity)이라고 강조했다. 기업들은 정부와 사회의 요구에 마지못해 따라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윤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윤리적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

미국에는 현재 100개 이상의 윤리경영연구소가 있는데 벤틀리대 기업윤리센터는 미국에서 처음, 아마도 세계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연구소라는 것이 호프만 소장의 자랑이다.

1976년 이 센터가 세워졌을 때 월스트리트 저널은 “똑똑한 바보(oxy moron)”라며 조롱했다고 한다. 즉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과 윤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기업윤리’란 ‘똑똑한 바보’나 ‘점보 새우’처럼 이상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대형 유통업체 시어스의 최고경영자 앨런 레이시가 “윤리적 성실함이 사업의 기초”라고 할 만큼 기업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연구소는 기업윤리에 대한 연구와 기업경영자 및 윤리임원 교육, 기업윤리프로그램 컨설팅 등을 하고 있다.

보스턴=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신뢰경영' 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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