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된 유럽을 되살리는 길 ‘CSR’=1995년 EU집행위원장이던 자크 들로르가 유럽의 대표적인 기업인들과 경제단체들로부터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 기업선언’을 이끌어내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유럽의 움직임은 본격화됐다.
당시 유럽은 80년대 말∼90년대초에 걸쳐 독일의 통일, 동유럽 붕괴 등의 사회적 격변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들로르는 유럽 통합을 가로막는 상황을 극복할 원동력을 기업에서 찾았다. 2000년 리스본에서 열렸던 유럽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정상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공동선언문을 채택, ‘CSR 운동’은 가속도가 붙었다.
2001년 EU집행위원회가 유럽식 기업윤리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개념을 집대성한 ‘그린 페이퍼’를 내놓으면서 CSR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유럽사회의 강력한 사회적 의제로 부상했다. 그린 페이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 “기본적으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더 나은 사회와 더 맑은 환경에 공헌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네트워크를 통해 모범기업을 확산시킨다=들로르의 지원 등에 힘입어 1996년 EU의 지원을 받는 기업윤리 추진단체 ‘CSR유럽’이 1996년 출범했다.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 단체는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수행한 기업들의 사례를 발굴해 다른 업체에 확산시키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고 있다.
CSR유럽의 활동 방침이 담겨있는 ‘CSR유럽 헌장(charter)’은 “기업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사업관행의 근간으로 삼아 높은 이익과 지속가능한 성장(sustainable growth), 인간적인 측면의 진보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임무를 밝히고 있다.
CSR유럽의 회원업체인 로열더치셀 로레알 폴크스바겐 다농 존슨&존슨 IBM 나이키 유니레버 등 59개 업체가 각각 5만유로의 연회비를 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CSR유럽은 유럽 각국을 돌며 학술세미나 등으로 진행되는 ‘유러피언 비즈니스 마라톤’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캠페인은 2005년에 기업과 투자자, 노동계 관계자, 각국 정부 관계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릴 ‘제 1회 CSR 비즈니스 올림픽’에서 절정을 맞는다. 이 올림픽은 4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릴 예정.
▽윤리적 기업에만 투자=유럽에서는 ‘사회적 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SRI)’를 권장하는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이를 위해 독일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의 투자자 단체들은 2001년 사회적 책임투자 포럼인 ‘EUROSIF(European Sustainable and Responsible Investment Forum)’를 세웠다. 친(親)환경펀드인 그린펀드 또는 윤리적인 기업에 투자하는 ‘윤리 펀드’ 등 ‘SRI펀드’는 꾸준히 늘어나 현재 유럽지역에서만 30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CSR유럽의 코디네이터 아델린 힌더러는 “최근 연구결과는 유럽지역의 투자자 가운데 77%가 SRI펀드에 대한 투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주요 기업의 IR 담당자들도 자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윤리적 기업이라는 것을 입증할수록 기업활동에 현실적인 이익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고 설명했다.
브뤼셀=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유럽 신뢰경영, 美 주주중심 경영과의 차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유럽의 신뢰경영 흐름은 투자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투명한 경영방식이나 회계제도, 기업의 기부행위 등을 강조하는 미국식 ‘기업윤리(Business Ethics)’와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미국 기업윤리의 출발점으로는 1982년 두통약 제품에 한 범죄자가 독극물을 투입하자 제약업체인 존슨&존슨이 피해를 감수하고 1억 달러어치의 제품을 모두 거둬들인 ‘타이레놀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윤리경영이 기업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학계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비즈니스 스쿨들은 앞다퉈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이후 미국의 기업윤리는 금융 중심지인 ‘월스트리트’가 주도해 왔다. 투자가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계는 기업에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경영과 회계를 강하게 요구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좌파의 영향력이 강하고 노동자들의 입김이 센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기업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진행돼 왔다. 그러나 ‘CSR’가 구체적인 개념으로 정립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이런 배경의 차이 때문에 미국의 기업윤리는 ‘주주(shareholder)’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하면서 기업의 ‘경영전략’ 차원에서 성장해 왔다. 이와 달리 유럽에서는 기업 노동자 투자자 정부 사회단체 등 기업의 모든 ‘이해관계자(stakeholder)’를 동등하게 중시하는 유럽식 기업윤리 문화가 형성됐다.
고려대 경영학과 문형구(文炯玖) 교수는 “하지만 최근에는 미국에서 종업원에 대한 인격적 대우나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 등이 강조되고 유럽도 기업과 투자자의 이익을 강조하면서 서로 수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발상의 차이 때문인지 문제해결 방식도 달랐다. 미국은 지난해 엔론 스캔들 이후 정부가 주도해 회계관련 제도를 전면개편한 데서 볼 수 있듯 시스템을 통한 해결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럽의 기업윤리 움직임은 기업의 자발성을 강조하면서 장점을 서로 닮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CSR유럽의 홍보책임자인 니키 베네트는 “유럽 국가들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만큼 각양각색의 기업사(史)와 기업지배구조, 노동환경을 갖고 있어 미국처럼 일률적인 제도를 강제할 수는 없다”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되 유럽통합을 목표로 서로의 긍정적인 측면을 배워가며 합일점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CSR유럽 사무국장 장 노트르담 기고▼
유럽의 기업들은 급속도로 진행되는 기술변화와 시장의 새로운 요구 등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편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고령화와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부담 증가, 장기적인 실업과 소수인종 문제 등으로 허덕이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과 사회의 공조가 더욱 절실하다. 다행히 유럽의 기업들은 자신들이 유럽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으며 ‘세계적인 경쟁’과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세계화와 유럽통합 등의 정치, 경제적 변화는 기업활동의 지평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동도 국경에 한정되지 않는 넓은 시야와 관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EU는 다각도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0년 유럽 정상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은 이 문제를 강조했으며 이듬해 EU집행위원회는 이례적으로 기업문제를 주제로 한 그린 페이퍼를 내놓았다.
국가별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 움직임은 강화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2000년대 들어 CSR문제를 전담할 각료를 임명했다. 프랑스와 덴마크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사회와 환경 등에 기업이 기여한 내용을 담은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도록 법제화했다.
최근에는 EU가 기업에 사회, 환경문제와 관련된 기업활동 보고를 의무화하는 제도를 도입할 것인지를 놓고 토론이 활발하다. 입법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적어도 유럽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CSR’가 이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고 점점 더 기업의 일상적인 활동에 접목되고 있다. 하지만 기업과 사회가 진정한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너무나 멀다.
(CSR유럽 전략 및 이해관계자 대화 담당 사무국장)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 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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