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오시지 말라니까요. 우리 회사는 가급적 은행을 멀리하려 하는데….”
7일 오후 서울 구로공단 3단지의 한 공장. 전선 제조업체인 한국KDK 하연수 사장과 국민은행 구로벤처센터 김지섭 기업금융지점장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 지점장이 대출 서류를 들고 회사를 찾아온 것도 이번이 다섯 번째. 그에게 한국KDK는 꼭 잡고 싶은 우량고객이다.
그러나 하 사장은 “당분간은 돈도 필요 없고, 30년간 거래해온 은행을 바꿀 수도 없다”며 김 지점장의 ‘구애’를 물리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하 사장은 “허허, 은행이 돈 쓰라고 회사로 찾아오기도 하니, 세상 좋아졌네”라며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중소기업이 밀집한 구로공단에서는 요즘 이런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은행으로 기업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은행원이 ‘세일즈맨’처럼 기업을 찾아다니는 달라진 풍경이다. 들어온 예금을 마땅히 굴릴 데가 없는 은행들이 유망한 중소기업을 잡느라 경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로공단에는 작년부터 은행마다 지점을 새로 내거나 규모를 늘리고 있다.
이 지역의 오랜 ‘강자’ 기업은행은 작년부터 구로공단 지점의 기업금융팀을 독립시켰다. 건물 2층에 세를 내줬던 업체를 내보내고 기업금융팀을 발족시켜 공단 내 7개의 소형 지점과 연계해 수성(守城)작전에 들어갔다. 이 지점의 유희태 기업금융지점장(RM)은 “2년 만에 여수신 총액을 2860억원에서 8000억원으로 늘린 것은 열심히 발로 뛴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금융팀 직원들에게 구내에서 점심 식사를 못하게 한다. 밥도 업체 사람들과 먹으라는 주문이다.
유 RM 자신도 이날 점심을 먹고는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바로 부근의 카오디오 부품업체인 TBK사를 찾아갔다. 별일이 없어도 고객 기업을 찾아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면 간단한 ‘경영컨설팅’이 되는 셈이다.
구로공단은 그동안 기업은행의 아성이 워낙 두꺼웠던 지역. 그래서 우리은행을 제외한 다른 은행들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 잇따라 들어서는 아파트형 공장 건물에서는 어김없이 은행 지점 간판을 볼 수 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400여개였던 이곳의 입주 기업체 수는 현재 1400개로 늘어났다. 벤처단지로 탈바꿈하면서 정보기술(IT) 업체들이 크게 증가했다. 2년 후에는 3000여개로 불어날 것이라는 예상. 수익이 빠듯한 대기업 대출에서 중기로 눈을 돌린 은행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요지(要地)’다.
작년 7월 개설된 국민은행 구로벤처센터 김 지점장은 “기업은행 벽이 두껍긴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투지를 자극한다”고 말했다.
그가 목표로 잡고 있는 한 기업의 대출제안서를 보니 다양한 서비스가 적혀 있다. ‘은행 방문이 필요 없고 외부회계감사시 75%까지 경비지원, 통역서비스 지원 등’이다. 주말이면 그는 공단 산악회 골프 모임을 열심히 쫓아다닌다.
기업은행 유 RM은 “기업들이 은행들간에 금리 경쟁을 시킬 정도로 은행과 기업의 관계가 역전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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