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만4000여명의 소도시에 600여명 이상을 상시 고용하는 일터가 있다는 것은 주민들에게는 큰 ‘축복’이다. 판매원으로 일하면 월 80만∼120만원을 받을 수 있어 가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
수년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비닐하우스 농가가 많은 인근 부여군 세도면이나 대규모 공장이 있는 전북 익산을 기웃거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젓갈시장에 인력을 빼앗긴 이 지역 식당들이 오히려 구인난을 하소연할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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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강경지역의 인구 감소율은 연 0.3% 안팎으로 뚝 떨어졌다. 전국 농촌의 평균 감소율(1∼2%)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것. 2001년 말에는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도 보였다.
강경은 평양, 대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국내 3대 시장의 하나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서해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 집산지로 ‘동해에 원산이 있다면, 서해에는 강경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 오죽하면 ‘강경의 개는 입에 조기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나 내륙의 교통이 발달하면서 해상로에 의존하던 강경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가 강경을 비껴가자 청주와 공주 등이 강경 상권에서 이탈했고,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급기야 군청마저 인근 논산으로 옮겨갔다.
‘옛 영화(榮華)를 되찾아 보자.’
강경주민들이 지역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1997년경.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강경되살리기 운동’에 나서면서부터다. 이 지역 출신인 논산시의원 강중선(姜重善·59)씨가 “강경의 자랑인 젓갈부터 살려보자”며 젓갈축제를 제안하면서 불이 붙었다.
지역살리기 운동은 주도면밀하게 추진됐다. 강경이 최근 ‘지역살리기의 교과서’로 불리는 것도 이런 치밀한 ‘기획력’ 덕분이다.
주민들은 우선 충남발전연구원에 지역살리기를 위한 용역을 의뢰, 세밀한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이를 통해 문화관광 주민의식 주거환경 지역경제 도로교통 등 5개 분야 30개 사업을 확정했다. 젓갈축제를 개최하고 기능대학을 유치하며, 근대건축물 보존과 금강둔치공원 조성, 옥녀봉 주변 개발 등을 핵심사업으로 선정했다.
이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 강경맛갈젓축제. 1997년 시작돼 올해 7회를 맞는 이 축제는 강경되살리기를 점화하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됐다.
축제 참석자는 첫해 1만9000명에서 지난해(6회) 47만명으로 기하급수처럼 늘어났다. 같은 기간 축제기간 매출액도 28억여원에서 210억여원으로 8배, 젓갈 점포수는 20개에서 70여개로 늘었다.
축제를 성공으로 이끈 핵심요인은 한번 맛보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젓갈맛. 이 밖에 내외국인 젓갈김치 담그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도 크게 일조했다.
김법철(金法澈) 강경전통맛갈젓상인협회장은 “강경 젓갈의 맛은 전통적인 숙성기술과 현대적 제조시설을 접목해 나온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은 젓갈시장에서 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시어머니 것’ ‘며느리 것’하고 주워섬기며 ‘덤’을 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2005년 개교를 목표로 지난해 착공한 강경기능대학도 강경되살리기 운동을 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능대학 유치는 지역경제가 되살아나면서 점증하고 있는 교육에 대한 주민욕구를 ‘흡수’하기 위한 것. 주민들은 이 지역 번영회를 중심으로 지역 국회의원과 출향인사를 모두 동원해 타지역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기능대학을 강경읍 채운리로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대학을 세우는 데는 300억여원이 투입되는 데다 학교 정원이 400여명(5개 학과)이나 돼 강경 발전에 큰 축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한병수(韓秉洙) 강경읍장은 “기능대학 터는 본래 공동묘지였다. 그러나 지역발전을 위해 학교유치가 필요하다는 설명에 묘 주인들이 흔쾌히 이장에 협조했다. 덕분에 주관부처인 노동부에 좋은 설립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논산시와 강경읍 등은 앞으로 강경을 근대건축문화의 전시장으로 만들어 간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고도(古都)의 옛 모습을 되살리려는 노력이다.
강경에는 일본인들이 1900년대 초 상권 장악을 위해 지은 호남병원 한일은행강경지점 강경노동조합 금성다방 등 옛 모습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때 강경의 번영을 상징한 이 건물들은 앞으로 중요한 문화 관광시설로 활용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젓갈축제)와 교육(기능대학유치)에 이어 문화육성이라는 종합적인 지역살리기의 틀이 완성될 전망.
정현수(鄭鉉洙) 강경읍번영회장은 “주민들이 내손으로 지역 발전을 이루겠다는 의욕이 강렬하다”며 “과거처럼 각종 기관의 논산 이전을 반대하는 데만 매달렸다면 지금처럼 강경을 되살리는 것은 요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제 한 소설가가 묘사한 옛 강경장터의 모습을 추억이 아닌 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강의 수운을 통해 내륙의 산물과 군산쪽의 해산물이 함께 모였고 한창 때는 하루 100척이 넘는 배가 드나들고 2만∼3만명의 전국 상인들이 북적댔다. 장터에는 극장 술집 요정 젓갈집 정미소 등이 들어서 항상 흥청거렸다….’(김주영의 ‘객주’ 중에서)
강경=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 강경 청사진 설계 충남발전硏 김정연 실장
“지역이 부흥하려면 발전 잠재력과 발전 전략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향을 발전시키겠다는 애향심과 의지겠지요.”
‘강경 되살리기 운동 종합계획’ 용역 연구를 주도해온 충남발전연구원 김정연(金正淵·47·사진) 연구실장은 지역 발전의 성공 요인을 이같이 지적했다.
그는 이 용역 연구를 수행하면서 지역민들이 요구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개발 전략을 추가로 제시했다. 또 젓갈, 금강, 근대건축물로 대표되는 강경의 발전 잠재력을 면밀히 분석해 분야별로 세밀하고 구체적인 전략추진 과제를 내놓았다.
강경 되살리기 종합계획은 행정자치부가 전국 시군에 배포, 소도읍육성계획의 ‘교과서’로 활용토록 할 만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이 같은 전략적 추진 과제 방식의 소도읍육성계획을 마련해 올해부터 매년 20개 시군(올해는 14개)에 100억원씩을 지원할 예정.
“강경 되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배운 큰 교훈은 지역 리더(leader)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경의 경우 지역의 지도층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자치단체보다 앞장서서 발전 대책을 고민해 왔다”며 “연구기관에 용역을 맡겨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식이 아니라 수시로 용역팀에 의견을 전하는 적극성을 보였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용역을 맡겨놓고도 김 실장과 20여 차례나 만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부 화랑은 강경사진특별전을 지원하고 건축 동호인들은 강경건축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등 ‘스스로’ 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것. 이 활동은 강경지역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앙과 타지역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 실장은 “강경 되살리기는 주민들의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지역발전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전범이 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강경=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강경은 한때 서해 수산물 집결지… 호남선 밀려 쇠퇴
충남 남부지역의 강경(江景)은 사투리로 ‘갱갱이’라고 불린다.
인구 1만4000여명, 면적 6.93㎢의 작은 도시이지만 1920년대에는 유동인구까지 합쳐 10만이 넘을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충남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고 우편수취소가 생길 정도였다.
읍내 깊숙이 배가 들어와 조선시대부터 서해 수산물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해 평양 및 대구와 함께 국내 3대 시장으로 꼽혔다. 또 원산과 함께 2대 포구로 불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해 금강 남쪽지역 가운데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구한말 객주(客主)가 등장했으며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상권을 잡기 위해 정착, 각종 관공서와 기관들이 들어섰다. 논산군의 지방법원과 검찰청 경찰서가 지금도 강경에 위치해 있다.
경부선 호남선 철도가 생겨 내륙 운송이 발달하면서 강경은 쇠퇴기를 겪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노력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앞으로 포구복원, 젓갈전시장 확대 등 야심찬 지역발전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 김우식 연세대총장, 서형래 한국관광공사 감사, 탤런트 강부자씨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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