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당을 만들어야겠는데 이 대행께서 좀 나서 주십시오.”
이만섭은 잠시 망설이다가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새정치국민회의도 얼마나 좋은 당인데…”라고 DJ의 말을 완곡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DJ의 음성은 짧고 단호했다. “내가 벌써 광주에 가서 (신당창당을 시사하는) 얘기를 해놓은 상황이니 그렇게 해주시죠.”
DJ는 이날 광주에서 “각계의 신선한 피를 수혈해 당이 새 출발하도록 하겠다”고 신당창당 의지를 밝혔다.
더 이상 토론의 여지는 없었다. ‘오너’가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재창업을 하겠다는데 ‘고용사장’이 말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만섭은 결국 다음날인 7월23일 “연말까지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여권 핵심부에서 신당창당이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DJ 취임 초인 98년 추진했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측과의 ‘민주 대연합’ 구상이 무산되면서 98년 말부터 국정주도세력 확대를 위한 아이디어가 여권 내부에서 모색되기 시작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DJ의 신당창당 최종목표는 ‘개혁정권의 재창출’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해 8월 신당창당 과정에서 DJ를 독대한 한 재야출신 인사는 “총선에서 최대 과반수, 최소한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해 개혁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그 여세를 몰아 개혁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것이 당시 DJ의 계획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99년 3월 DJ에게 비선(비線)을 통해 황태연(黃台淵·현 동국대 교수) 정책기획위원이 작성한 장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중도개혁’을 기치로 개혁세력의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였다. 황태연은 본사 취재진에 “당시 신당창당을 통해 국정운영의 동력을 얻지 않고는 ‘국민의 정부’의 개혁 작업을 완수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국민의 정부의 도덕성에 타격을 준 고관부인 상대 ‘옷로비 의혹’ 사건의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서도 대규모 ‘신장개업’이 절실했다. 호랑이는 안 되더라도 최악의 경우 고양이라도 그려내지 않으면 이듬해 총선이 힘들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여권핵심부 내에 팽배한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신당의 방향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했다. 당시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황태연이 새로운 토대 위에 새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쪽이었다면 이종찬(李鍾贊) 전 국가정보원장은 DJP 연합을 토대로 외연을 넓히는 방안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DJ가 총재직을 내놓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이던 민주당 이강래(李康來) 의원은 “집권은 했지만 여전히 ‘호남당’에 머물러 있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김 대통령이 아예 공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당을 만들 필요성이 논의됐었다”고 말했다.
실제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 사무총장은 그해 가을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를 신당 총재로, DJ를 명예총재로 하는 합당 방안을 DJ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DJ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양당 합당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여건 성숙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당시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DJ의 ‘2선 후퇴안’이 거부된 데는 입지 상실에 불안감을 느낀 동교동계의 강력한 반대도 작용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합당에 대한 자민련측의 뿌리 깊은 거부감도 DJP 신당창당을 가로막은 요인이었다. 김중권(金重權)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7월18일 DJP의 ‘워커힐 회동’에서 합당에 원칙적 합의가 이뤄졌으나 자민련 내부에서 ‘합당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JP가 합당 논의 자체를 ‘없던 얘기’로 돌려버렸다”고 말했다.
물론 DJ가 자민련에 대한 미련까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여권의 고위관계자는 “DJ는 독자적으로 신당작업을 벌여나가다 보면 적절한 시점에 자민련도 가세할 수 있고, 국민회의와 자민련, 외부 영입세력이 함께 하는 ‘2+α’ 형태의 창당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DJ는 실제 ‘워커힐 회동’이 끝난 직후 자신의 합당 제의를 JP가 수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국민회의 사무총장이던 한화갑을 불러 “(합당을 전제로 한) 신당창당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만큼 자민련을 껴안고 가는 신당에 애착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신당 자체가 이인제(李仁濟) 의원을 중심으로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분석도 유력하다. 당시 여권의 고위관계자는 “실제 이인제를 중심으로 2000년 4월 총선을 치렀고, 2002년 대선후보 경선도 이인제가 ‘지방선거를 책임지겠다’며 4월 조기전당대회를 주장하자 4월로 그 시기가 결정되는 등 신당의 시계추가 한동안 이인제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이 사실이다”고 지적했다.
국민회의 바깥에서 시작된 재야쪽의 ‘개혁적 국민정당’ 논의도 DJ의 신당창당에 원군(援軍) 역할을 했다. DJ는 실제 당 밖의 재야 시민단체와 전문가 출신을 망라한 ‘알파 세력’을 주축으로 기존 국민회의 세력을 결합시키는 방식에도 한때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김상근(金祥根) 목사와 이창복(李昌馥) 민주개혁국민연합 상임대표, 이재정(李在禎) 전 성공회대총장 등이 중심이 된 이들 ‘재야 세력’은 지역정치 탈피와 국민정치 참여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신당의 당명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초기 논의과정에서 ‘참여 민주당’이 유력하게 검토되기도 했다. DJ가 광주에서 ‘각계의 젊은 피’를 언급한 것은 이들 재야세력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창당 과정에 접어들자 중심축은 기존의 국민회의 세력, 그중에서도 동교동계 핵심 실세들로 다시 옮겨갔다. 형식상으로는 당 외곽에 국민회의와 외부영입인사들로 창당추진위 출범→창당준비위 발족→국민회의 해산과 동시 합당결의라는 다소 복잡한 절차를 밟았지만 결국 신당창당의 모태는 국민회의였다. 계획 자체의 성안도, 당사를 마련한 자금도, 조직까지도 국민회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신당추진위 총무위원장을 맡았던 이재정 현 민주당 의원은 “신당 분위기를 만든 것은 ‘국민대토론회 준비위원회’ 등 당 밖의 개혁세력이었으나 창당 작업은 역시 정균환(鄭均桓) 신당추진위 조직위원장이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 주도해나갔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DJ는 한때 신당추진 작업을 비서실장 김중권에게 맡기려 했다.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중권은 ‘대통령비서실에서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또 다시 DJ당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며 DJ를 설득했다. DJ는 결국 신당추진 작업을 당쪽에 맡겼으나 여전히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들에게 이를 맡길 만큼 신당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3김시대 이후에도 자생할 수 있는 새로운 집을 짓겠다”는 야심 찬 목표 아래 시작한 신당창당 작업은 외부인사 영입에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질과 구조의 측면에서 과연 얼마나 새로워졌느냐는 의문을 낳았다.
‘21세기형 열린 정당 창당’이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DJ의 카리스마와 이를 대리집행하는 동교동계가 창당을 실질적으로 주도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DJ와 동교동계는 이후 민주당의 개혁론이 비등할 때마다 당내 개혁세력의 집중표적이 됐다.
▼창당 '비밀병기' 정균환▼
새천년민주당 창당을 위한 ‘수혈작업’은 신당추진위 조직위원장이던 정균환(鄭均桓·사진) 현 민주당 원내총무가 총괄했다. 그는 과묵함과 부지런함, 특정 계보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DJ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비밀병기’였다.
DJ는 99년 6월경 국가정보원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이종찬(李鍾贊)을 불러 “신당을 창당해야 하는데 온건보수쪽 사람이 너무 적다. 정균환을 좀 도와 달라”고 당부했다. 이종찬은 이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던 80∼90명의 명단을 DJ에게 넘겼으나 DJ는 “수고했다”는 말만 하고 더 이상 이종찬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동교동계 실세였던 한화갑(韓和甲) 당시 국민회의 사무총장도 직접 추천한 인물은 나중에 신당 대표를 맡은 서영훈(徐英勳) 한 사람뿐이었다. 이 정도로 영입 작업은 철저히 정균환 중심으로 진행됐다. 국정원 청와대 등 요로를 통해 DJ에게 전달된 여러 종류의 각계 영입대상 명단은 정균환을 중심으로 한 10여명의 ‘핵심 준비팀’에 전달됐다.
최재승(崔在昇) 정동채(鄭東采) 정동영(鄭東泳) 의원과 김민석(金民錫) 전 의원 등이 참여한 준비팀이 스크린 작업에 들어갈 무렵 확보된 명단은 1만명이 넘었다. 김 전 의원은 “DJ는 과거 선거 때마다 외부 수혈을 통해 외연을 확장해 왔지만 개인적 인연을 통한 국지적 충원에 그쳤다. 반면 전국적으로 각계의 인재풀을 대상으로 영입대상을 검토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준비팀은 성별 지역별 직군별로 비율을 맞춰가며 최종적으로 대상을 100여명으로 압축했다. 한 관계자는 “영입대상의 접촉은 준비팀이 분담했지만 때로는 크로스체크와 여론조사를 병행하기도 했다. 막판에 지역구나 ‘코드’ 문제로 틀어져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인사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쳐 영입된 인사들에게 모두 국회의원 공천이나 정부직 등 역할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신당의 모양 갖추기를 위해 멀쩡하게 자기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놓고는 총선이 끝나고 난 뒤 ‘일회용 반창고’ 취급을 함으로써 정치불신을 더욱 심화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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