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을 아무리 높이고 값을 낮춰도 안장 생산을 고집하면 미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죽 다루는 데는 최고의 전문가다. 다른 방면으로 이 기술을 응용해 보자.”
고급 핸드백 벨트 장갑 등 세계적인 가죽 장신구 메이커인 ‘에르메스’는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코오롱은 더 이상 섬유업체가 아니다.’
코오롱은 최근 공격경영을 선언하면서 유기 자체발광소자(EL)사업에 우선 9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아직 내용을 공개하기에는 이르지만 올해 안에 2, 3건의 대규모 추가투자계획도 잡혀있다. 코오롱 조정호(曺正鎬) 사장은 “올 투자액은 2000억원을 훨씬 넘어 예년의 2∼3배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코오롱의 이 같은 행보는 투자를 꺼리는 최근 흐름을 거스르는 것. 조정호 사장은 “물론 실패확률도 있다”며 “하지만 기업이 신사업을 찾아가는 것은 생존본능이고 투자처는 있다”고 말했다.
코오롱의 올해 섬유사업부문 매출액 비중은 40% 이하다.
▽탈출구를 찾아라=“2000년 초 폴리에스테르 원사 가격이 파운드당 45센트까지 주저앉았습니다. 손익분기점이 60∼65센트였으니 팔면 팔수록 손해였죠. 2000년 한 해만 폴리에스테르 원사 사업에서 150억원 적자를 봤습니다. 동종업계 기업들이 줄줄이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코오롱 임추섭 IR팀장)
조정호 사장이 밀레니엄비전(MV)팀을 만든 것은 2000년 3월 무렵이었다. 화섬업체 대부분이 5년 이상 이어진 불황으로 한 치 앞을 가리지 못할 때였다.
“5년 후, 10년 후 뭘 먹고 살 것인지가 아득했습니다. 체면 가리지 말고 사소한 사업이라도 모두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MV팀 안태환(安泰煥·공학박사) 팀장은 신사업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학회, 세미나, 전시회 등 영감(靈感)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다녔다고 회상했다.
▽꿈을 먹고 사는 기업=코오롱은 ‘진화’에 익숙한 기업이다. 63년 나일론 원사를 생산해 합섬시대를 열었고 국내 자동차 산업이 발아하기도 전인 73년에는 타이어코드 사업을 시작했다. 80년대부터는 산업용 소재 사업으로 선회, 84년 필름 사업을 시작했고 88년에는 국내 최초로 IT소재 필름을 개발했다. 98년에는 초극세사 ‘로젤’을 개발했고 지난해에는 초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용 광확산 필름을 개발했다. 이 결과 섬유사업 비중은 2001년 45%에서 지난해 40%로 줄어들었다.
비결은 뭘까. 이웅열(李雄烈) 그룹회장은 지난해 말 사내 강연에서 ‘꿈꾸는 조직’을 강조했다. 경영자의 역할은 ‘집행’이 아니라 꿈과 비전을 설계하는 것이고 직원들도 한 직급씩 높은 시각에서 자신의 비전을 세우라는 주문이었다.
코오롱은 57년 창업 때부터 연구개발(R&D)을 중시했다. 92년에는 기존 사업 R&D에 치중하는 구미기술연구소와 별도로 경기 용인 마리에 중앙기술원을 설립, ‘꿈을 설계하는’ 작업에만 매달리게 했다. 지금은 R&D가 일반화됐지만 90년대 초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연구개발에 돈을 쏟아붓는 코오롱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위기와 기회=조 사장은 “화섬산업이 성숙산업이므로 역설적으로 코오롱은 계속 변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기의식 때문에 언제나 모색하고 준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기회가 오면 바로 잡을 수 있었다는 것.
코오롱은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구조조정을 단행, 부채비율을 97년 360%에서 지난해 112%로 줄였다. 코오롱이 20여건에 달했던 신사업 후보 중 유기EL로 가닥을 잡은 것은 핵심역량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꾸준한 R&D로 필름 사업을 자체 기술로 해오다 보니 유기EL과 관련된 29건의 특허를 획득했다. 탄탄한 재무구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회가 왔을 때 움켜쥘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코오롱은 2006년까지 섬유사업 비중을 25%로 줄일 계획이다. 조사장은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순 없지만 2006년경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업으로의 방향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6년 이후 코오롱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뭐가 될까.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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