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14…명멸(明滅)(20)

  • 입력 2003년 5월 13일 18시 41분


두근! 두근! 귓가에서 맥이 툭툭 뛰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배낭만 현관에 내려놓고 집으로 향했다 서두르고 싶은데 다리가 저리고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왼쪽 가슴이 아프다 터질 것 같다 견딜 수 있을까 나와 내 심장은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장소에 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안다 문이 보였다 문이 가까워 왔다 문으로 들어섰다 지금 아내가 나오면 눈도 깜박하지 않고 나를 쏘아보리라 그런 아내의 눈을 그런데 아내가 아니라 동생이 나왔다 동생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방울 한 방울 셀 수 있을 정도로 빗발 굵은 비였다 언제부터 내린 것일까 동생은 윗입술에 묻은 빗방울과 눈물을 혀로 핥아내고 두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다시 폈다가 이번에는 주먹을 꽉 쥐었다 투명한 눈동자에 빛이 어리는 순간 얻어맞는 줄 알고 자세를 취했는데 동생은 주먹과 입술에서 한꺼번에 힘을 쭉 빼고는

형수가 집을 나갔다

…언제

형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해서 형수하고 둘이서 동사무소에 사망신고 하러 갔었다 그때 호적 보고 형수를 파낸 걸 알고 다음날 아침부터 안 보였다

딸들은?

있다

아이고 딸을 둘이나 그냥 내버려두고

…미옥이하고 같이 역 앞에 있는 형수네 친정에 가서 형수 어디 있는지 물어봤지만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카더라

모르는 게 아이고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했다고

밀양에는 없다고 하더라

동생은 입술을 꽉 깨물고 어린 사내아이처럼 고개 숙이고 신코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선물한 운동화가 아니다 발이 훌쩍 큰 것이다 나보다 커 보이니까 12문쯤 되려나 육상 선수로서의 내 미래는 이미 닫혔지만 동생은 아직 열일곱이다 2년 후 만약 전쟁이 끝나 있다면 5천과 1만에 출전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살아 계실 적에도 효도를 못했는데 임종 때까지 천하의 불효를 하다니 그런데 전혀 현실감이 없다 낯익은 풍경에서 소외되어 아니다 이 풍경 자체가 소외돼 있는 것 같다 현실은 윤곽과 색채를 잃었고 모든 감정도 박탈되었고 생의 의미조차 소멸되고 말았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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