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19>2부 부패의 그늘 ①사직동팀 폐지 전말

  • 입력 2003년 5월 14일 18시 58분


2000년 10월 사직동팀의 폐지로 DJ정권은 잇따른 친인척 연루 스캔들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사진은 99년 11월 전국검사장 회의에 입장하는 DJ와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10월 사직동팀의 폐지로 DJ정권은 잇따른 친인척 연루 스캔들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사진은 99년 11월 전국검사장 회의에 입장하는 DJ와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10월 초. K검사장은 퇴근길에 승용차 안에서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당신, 지금 청와대 앞마당에 칼을 꽂겠다는 거야.”

신용보증기금 대출보증 외압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검 특수1부가 청와대 ‘사직동팀’(경찰청 조사과) 소속 이모 경정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키로 했다는 방침을 전해 듣고 전화를 건 이 관계자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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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팀은 대통령의 ‘하명’을 받아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감시 조사하는 조직. 이 팀이 수집한 정보 및 수사 결과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장 및 지휘책임자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99년 말까지는 법무비서관) 등 3명에게만 전달됐다. 그런 만큼 사직동 팀원의 구속은 DJ 정권에 도덕적 치명상이었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K검사장의 차가 성수대교 밑을 지나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K검사장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모 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가 청와대 관계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데 사실이냐.”

K검사장은 “다리 밑이라 통신장애가 생겨 전화가 끊겼는데 오해를 한 것 같다”고 해명한 뒤 이 경정에 대한 구속수사를 할 수밖에 없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청와대측에서 학연 지연이 닿는 간부 검사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법무부 장관을 통해 검찰 수뇌부에 수사 관련 의견을 전달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청와대측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서울지검 특수1부는 결국 10월 9일 이 경정을 구속했다. 혐의는 이 경정이 99년 4월 이운영(李運永) 신용보증기금 영동지점장의 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제보자에게서 돈을 받고 이운영을 호텔 객실 등에 불법 감금했다는 것이었다. 이 경정은 1년 후 항소심에서 수사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 이후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 경정의 구속으로 사직동팀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DJ는 이 경정의 구속 일주일 뒤인 10월 16일 사직동팀의 해체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72년 대통령 특명사건을 전담 수사하는 ‘치안본부 특별수사대’로 출발해 ‘정권의 사설정보기관’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특수1대, 경찰청 조사과로 이름을 바꾸며 변신을 거듭했던 ‘대통령 친위대’의 종말이었다.

당시 사직동팀 해체를 불러온 이운영에 대한 외압의혹 사건은 정권 핵심부가 연루된 또 다른 의혹 때문에 더욱 인화성이 강했다. 바로 박지원(朴智元)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이 이운영에게 전화를 걸어 대출보증 압력을 행사했는지 여부였다.

마침 검찰이 2000년 8월 한빛은행 관악지점의 아크월드(건축자재 수입업체)에 대한 거액 불법 대출 혐의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직후 이운영은 기자회견을 열고 박지원을 공개적으로 공격했다.

이운영은 당시 “박지원 수석이 99년 2월 아크월드 대표 박모씨와 청와대 행정관이었던 박씨 동생의 부탁을 받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아크월드에 대한 대출보증 압력을 넣었다”며 “내가 대출 보증을 거절하자 사직동팀이 가둬 놓고 수사를 한 것도 박 수석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지원이 대출보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운영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의 수사결과는 사직동팀 이 경정이 신보 영동지점 팀장 김모씨에게서 “이씨가 대출보증을 할 때마다 보증금액의 일정액에 해당하는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제보를 받고 이운영을 조사했다는 것이었다. 이운영에 대한 사직동팀 수사와 박지원이 지시한 것 사이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문제는 조사 과정에서 사직동팀을 지휘했던 박주선(朴柱宣·민주당 의원) 법무비서관이 사직동팀에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 사직동팀 해체에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는 점이다.

대검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 출신인 박주선은 DJ 정부의 출범과 함께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돼 99년 12월 옷로비 사건과 관련된 사직동팀의 내사 보고서 유출 혐의로 구속되기 직전까지 사직동팀을 지휘했다.

그러나 박주선은 2000년 10월 3일 검찰에 소환돼 이운영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았는지의 여부 등을 조사받고 나와 기자들에게 “고위 공직자가 연루되지 않고 액수가 적은 사건은 내가 보고받지 않고 행정관이 판단해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어쨌든 이 경정이 호텔에서 직접 수사를 한 것은 사직동팀 통상의 업무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적인 지적을 했다.

이 같은 박주선의 태도는 사직동팀을 직접 지휘했던 책임자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전직 사직동팀원 A씨의 해석.

“사직동팀의 명령 및 보고체계는 법무비서관-최광식(崔光植·경찰청 혁신기획단장) 사직동팀장-20여명의 팀원으로 일원화돼 있었습니다. 사직동 팀장과 팀원은 모두 경찰로 일체감이 뚜렷했지만 검사 출신인 법무비서관은 거리감이 있었죠.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 감시 문제를 놓고도 의견차를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대립은 사직동팀의 옷로비 사건 보고서 유출 문제 때문에 빚어졌습니다.”

이에 앞서 박주선은 99년 12월 대검 중수부에서 사직동팀의 옷로비 사건 내사보고서 유출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을 당시 “최종 보고서를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에게 전달한 적은 있지만 최초 보고서는 본 적도 없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검찰에 소환된 사직동 팀장과 팀원들은 최초 보고서가 법무비서관에게 보고됐다고 진술해 그의 구속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다른 사직동 팀원 B씨의 설명.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최종 보고서는 법무비서관이 작성합니다. 최초 보고서는 사직동 팀장과 팀원들에 의해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두 보고서의 내용이 많이 달랐던 겁니다. 법무비서관은 최초 보고서의 내용과 다른 최종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 것이죠.”

최초 보고서 유출 경위에 검찰 수사가 집중되던 99년 11월 어느 날. 박주선은 대통령법무비서관실로 최광식 사직동 팀장을 불렀다. 사직동 팀장과 법무비서관은 독대가 원칙. 그러나 이날 박주선은 청와대 파견 검사 2명과 함께 있었다.

△박=(최초 보고서를 최광식에게 건네며) 이런 것을 만든 적 있나요.

△최=(보고서를 들척이며)….

△박=나는 처음 보는데. 이게 외부에 돌아다닌다는데….

△최=만든 적 없습니다.

결국 파견 검사 2명이 사무실에서 나간 뒤 박주선과 최광식은 고성(高聲)으로 대판 다투었다는 후문이다.

박주선의 구속영장에는 최초 보고서 유출혐의도 포함됐으나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는 2001년 11월 이 사건 1심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박주선)이 최초 보고서를 유출했다는 혐의를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사직동팀 경찰관들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다.

아무튼 DJ는 2000년 1월 옷로비 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자 법무비서관 직제를 없앴다. 사직동팀은 민정수석비서관이 대신 지휘하도록 했다. 27명이던 팀원도 절반으로 줄었고 최광식 사직동 팀장은 경찰대 치안연구소로 전보됐다.

사직동팀은 이미 이 사건의 여파로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졌다. 자연히 DJ의 아들인 홍일(弘一) 홍업(弘業) 홍걸(弘傑) 세 형제를 포함해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에 대한 감시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0개월 뒤인 2000년10월 사직동팀이 폐지됨으로써 DJ의 주변에 대한 감시 감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사직동팀 활동 위축 시기 홍업 홍걸씨에 청탁 집중▼

“사직동팀(경찰청 조사과의 별칭)이 있었다면 DJ의 차남과 막내인 홍업(弘業) 홍걸(弘傑)씨가 교도소에 수감되는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DJ정권 중반 청와대에 파견돼 근무했던 한 검사는 사직동팀 폐지의 여파를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이 검사는 “근무 당시 홍업 홍걸씨를 포함해 대통령 친인척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손발이 없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사직동팀이 관리했던 대통령 친인척은 모두 100여명. 사직동 팀원들은 이 가운데 DJ의 아들 등 중점관리 대상은 상시 점검했고 나머지는 정기적으로 체크했다.

DJ 정권 초기 사직동팀의 활동은 홍업씨 주변에 집중됐다.

사직동팀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의 설명.

“홍업씨의 뜻과 관계없이 그의 주변에는 질 나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심지어 폭력조직까지 홍업씨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징후도 보였죠. 정말 열심히 조사해서 있는 그대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 강남의 모 호텔 객실과 역삼동 모 빌딩에 설치됐던 홍업씨의 개인 사무실 두 곳 가운데 호텔 사무실은 폐쇄됐다.

홍걸씨를 등에 업고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청탁 등을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규선(崔圭善)씨도 98년 9월 사직동팀의 견제로 미국으로 쫓겨갔다.

그러나 사직동팀의 활동은 관리 대상들의 본격적인 반격에 부딪히게 된다.

사직동팀 관계자는 “99년 들어서면서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에게 사직동팀에 대한 음해가 여러 건 전달됐다. 이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인 것처럼 각색돼 위에 전달되면서 팀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일부 사직동 팀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위에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리 대상자 및 그 주변 사람들을 직접 만나 경고하는 등 ‘과잉 의욕’을 보인 것이 역풍을 불러온 원인이기도 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아무튼 나중에 검찰 조사 결과 홍업 홍걸씨가 집중적으로 로비 청탁을 받은 시기는 2000년 6월∼2001년 말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공교롭게도 사직동팀의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해 폐지(2000년 10월)된 시기와 겹친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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