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5월 15일 18시 52분


猛虎出林(5)

경포(경布)는 육현(六縣)사람으로 원래 성은 영(英)씨였다. 검수(黔首=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힘이 좋고 품은 뜻이 남달랐다. 한번은 용한 점쟁이가 지나가다가 그이 상을 보고 말했다.

“너는 나중에 모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왕이 된다”

여느 아이들 같으면 먼저 두려워해 마땅한 말이었으나 영포는 오히려 흐뭇한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은근히 형벌 받기를 서두르는 것처럼이나 그때부터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못된 짓만 골라 했다. 남의 재물을 훔치거나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다가 마침내 관부(官府)에 붙잡혀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새기는 형벌[경형]을 받게되었다.

먼저 칼로 얼굴에 죄명(罪名)을 쓰고 거기에 먹물을 부어 검푸른 자국으로 남게 하는 그 형벌은 고통스럽기도 하거니와 일생 흉악한 죄명을 얼굴에 문신으로 덮어쓰고 다녀야하는 욕됨이 뒤따랐다. 그런데도 형을 받고 난 영포는 오히려 기쁘게 웃으며 여럿에게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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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 상을 보고 모진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될 것이라 했는데, 아마 이것이겠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놀렸으나 영포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이름조차 경포(경布)로 바꿔 자신이 형벌 받은 일을 남 앞에 내세웠다.

경포는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뜬 뒤에 여산(麗山)으로 보내져 시황제의 능묘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여산에는 전국에서 끌려온 수십 만 명의 죄수와 역도(役徒)들이 있었는데, 경포는 곧 그들 무리에서 두각(頭角)을 드러냈다. 남다른 힘과 배짱에다 얼굴에 검푸르게 뒤덮인 먹 글자가 사람을 위압하여 그를 둘러싼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 우두머리 노릇이 다시 다른 무리의 우두머리나 호걸들과 사귀게 하여 경포란 이름을 점점 키웠다. 그 뒤 경포는 따르는 무리 수백을 이끌고 여산에서 달아나 고향 근처의 장강 가에 자리잡고 떼도둑이 되었다. 주로 수적(水賊)질이었지만 힘이 자란 뒤에는 인근의 고을까지 노략질했는데, 그 바람에 그의 이름은 대택(大澤)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진승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진현(陳縣)에 이르러 마침내 <장초(張楚)>를 세우자 경포도 마음이 달라졌다. 평소 만만찮은 야망을 감춘 체 때를 엿보고 있던 파현(番縣) 현령 오예(吳芮)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장강 남북을 오르내리며 노략질하던 경포란 놈입니다. 진나라의 폭정을 만나 뜻을 잃고 도둑의 이름을 얻었으나, 이제 진현(陳縣)의 반가운 소문을 들으니 그냥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파군(番君=파현의 현령)께서는 언제까지 진나라의 현령으로 저들이 던져주는 쥐꼬리만한 녹봉에 목을 매고 계실 작정이십니까? 저와 함께 크게 군사를 일으키시어 천하를 뒤흔드는 이 풍운을 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예도 경포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 또한 진승의 소문을 듣고 은근히 몸달아하고 있던 판이었다. 기꺼이 경포의 말을 받아들여 함께 군사를 일으킴과 아울러 사랑하는 딸을 주어 그를 사위로 삼았다. 항우로부터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졌다가 나중에는 다시 한나라의 장사왕(長沙王)으로 살아남을 만큼 능란한 처세에 어울리게 밝은 오예의 사람 보는 눈이었다.

진나라가 보낸 현령으로서 진나라에 등을 돌린 오예와 도둑의 우두머리에서 의군(義軍) 장수로 옷을 갈아입은 경포가 군사 수천 명을 모아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진나라 장수 장함이 진왕(陳王) 진승을 이겨 그 근거지인 진현에서 멀리 쫓아 버렸다는 놀라운 소문이 들려왔다. 이어 진승의 부장이던 여신(呂信)이란 장수가 진승의 원수를 갚고 진현을 되찾았다는 말이 돌더니, 다시 장함이 보낸 진나라의 좌우 교위(校尉)가 여신을 내쫓고 진현을 도로 차지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잖아도 싸울 곳을 찾지 못해 몸을 꼬고 있던 경포는 곧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쳐 올라갔다. 진현을 지키고 있던 진나라의 좌우 교위는 그런 경포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거기다가 달아났던 여신이 다시 나타나 뒷덜미를 치니 더욱 견뎌내기 어려웠다. 한번 싸움에 크게 지고 쫓겨 달아나다가, 청파(淸波)에서 경포의 군사들을 만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장함의 부장인 두 교위를 죽이고 그 군사를 두드려 흩어버렸지만 경포는 그걸로 속이 차지 않았다. 그 우두머리 장수 장함을 찾아 다시 동쪽으로 군사를 휘몰아갔다. 그러다가 장함을 만나기 전에 항량의 소문부터 먼저 듣게 되었다. 소문이란 원래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특히 동양(東陽)현령 진영이 2만 대군을 이끌고 귀순한 것은 항량을 실제보다 몇 배나 크게 만들어 경포에게 전해주었다.

하지만 경포는 진영과는 달랐다. 소문만 듣고 달려가 넙죽 엎드리기보다는 한군데 자리를 잡고 항량이 오기를 기다려 사람됨과 따르는 세력의 크기를 가늠한 뒤에 거취를 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항량이 만난 것은 바로 그런 경포와 그가 거느린 군사들이었다.

원래 영(英)장군 이셨구려. 이 항량도 진작부터 장군의 높은 이름을 듣고 있었소. 하지만 장군께서는 평소 파양호(番陽湖)와 강수(江水) 사이에서 신룡(神龍)처럼 노니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멀리 여기까지 오셨소?”

항량이 말 위에서 두 손을 모아 경포에게 예를 표하면서 그렇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러나 근간의 일은 잘 모르는 듯하자 경포는 짐짓 뻣뻣하게 받았다.

“나는 진왕을 이긴 장함이 다시 여신(呂信)까지 쳐부순 뒤에 진현에 남겨둔 좌우 교위를 청파에서 잡아죽이고 오는 길이오. 이제 장함의 머리를 얻고자 뒤쫓고 있거니와, 항(項)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일이오?”

“장함을 쫓고 계시는 길이라면 마침 잘 되었소. 내가 멀리 회계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쳐 없애기 위함이나, 당장 급한 일은 주문(周文)을 죽이고 진왕을 핍박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만든 진장(秦將) 장함을 목베는 것이오. 우리 힘을 합쳐 함께 장함을 쳐부숩시다. 장함은 함양에 남은 진나라 군사를 모조리 끌고 와 그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소. 희수(戱水) 가에서 주문의 10만 대군을 질그릇 부수듯 하였고, 또 진왕이 근거하고 있던 진현을 한 싸움으로 우려 뺐으니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이끌고 온 병마가 5만은 되니 장군과 합치면 장함과도 해볼 만한 싸움을 펼쳐볼 수 있을 것이외다.”

며칠 전 진영에게 글로 써보내 재미본 말을 항량이 다시 해보았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겸손해도 은근히 세력을 내세우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경포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능청스레 말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이오. 항장군처럼 고명하신 분이 하찮은 이 몸을 따라주시겠다니 그저 감격할 따름이오.”

거꾸로 자신이 항량의 세력을 거두어들이겠다는 투이니 항량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장수들까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모두 경포를 노려보고만 있는데 항우가 가만히 보검 자루를 움켜쥐며 항량을 돌아보았다.

“작은 아버님. 아무래도 말로는 안될 위인 같습니다. 제가 가서 저 얼룩덜룩한 모가지를 베어 오겠습니다!”

그러면서 말고삐를 감아쥐는 것이 그대로 두면 바로 말을 박차 달려나갈 듯했다. 그때 항우보다 먼저 말을 몰고 나선 장수가 있었다. 이제는 항량과 항우의 사람이 되어 거기까지 따라온 환초(桓楚)였다. 환초가 말을 몰아 여럿으로부터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더니 경포를바라보며 소리쳤다.

“경포 형은 나를 알아보시겠소?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도록 하시고, 더는 항장군께 무례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투구를 젖혀 얼굴이 더 드러나도록 해 보였다. 경포가 그런 환초를 알아보고 반갑게 외쳤다.

“자네는 환초 아우 아닌가? 아직 택중(澤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회계로 돌아갔는가?”

죄를 짓고 졸개 약간을 모아 대택(大澤)에서 숨어 지내던 시절 환초는 역시 무리를 이끌고 강수(江水)를 타고 오르내리며 도적질을 일삼던 경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둘이 만날 때는 그런 패거리들 사이에 있기 마련인 하찮은 시비 때문이었으나, 서로를 잘 알게된 뒤에는 형제까지 맺어 서로 돕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지난 섣달에 항장군의 부름을 받고 오중으로 돌아갔다가 지금은 별장(別將)으로 이렇게 따라 나서게 되었소. 이제 여기 계신 항장군은 이 아우의 주인 되시는 분이니, 함부로 떠보려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이 아우에게 물으시오.”

그 말에 항량은 비로소 경포가 그렇게 뻣뻣하게 나온 까닭을 짐작했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직도 분을 못 삭여 씨근거리는 항우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때 한동안 말이 없던 경포가 갑자기 모든 것을 털어놓는 듯한 말투가 되어 물었다.

“좋아. 그럼 먼저 아우에게 묻겠네. 항장군은 정말 항연(項燕)장군의 혈육이신가?”

“그건 틀림없소. 이 아우가 목을 걸겠소!”

“저마다 왕공(王公)과 거족(巨族)의 후예라 우기는 세상이라 물어본 것일세. 그럼 진왕의 사자가 와서 장군을 상주국(上柱國)에 봉했다는 말도 사실인가? 진왕이 아직 살아 계신단 말인가?”

“진왕께서 살아 계신 걸 보지는 못했지만, 소평(召平)이란 사자가 와서 우리 항장군을 상주국에 봉하며 서쪽으로 밀고 나가 하루 빨리 진나라를 멸하라고 명한 일만은 틀림이 없소. 그 일에는 바로 곁에서 보고들은 이 눈과 귀를 걸겠소!”

그러자 경포는 더 뻗대지 않았다. 말없이 말 등에서 내려 홀로 걸어 나오더니 항량 앞에 이르러 전포(戰袍)의 오른 쪽 팔을 걷고 무릎을 꿇으며 시원스레 말했다.

“육(六)땅 영포가 삼가 상주국을 뵙습니다. 저와 제가 이끄는 군사들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개나 말의 수고로움[犬馬之勞]도 마다하지 않고 섬기겠습니다.”

항량이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그 손을 잡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양쪽 장졸들이 모두 기쁨과 감격에 찬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기뻐하고 감격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항량과 항우는 다시 제 발로 찾아온 장수와 대군을 그 밑에 받아들였다. 포장군(蒲將軍)이라 하여 끝내 고향도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장수와 그가 거느린 만여 명의 군사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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