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서경석/이라크, 한국NGO를 기다린다

서경석‘이라크 난민돕기 시민네트워크’ 목사

최근 이라크를 방문해보고 전쟁의 상처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전쟁이 워낙 속전속결로 치러지기도 했지만 미군의 족집게 폭격으로 민간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라크가 당면한 문제는 무정부상태에서 오는 혼란과 무질서, 35년간의 사담 후세인 독재로 누적된 적폐 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지금 의료팀이 이라크에 가는 것은 이라크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이라크는 그렇게 가난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건의료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의사의 수도 충분하다. 그리고 전상자 치료는 이미 종결되었다. 선진적인 치료방법을 전수하거나 현대적 의료기기를 전하는 것은 좋지만 진료를 위해 의료봉사 팀이 가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한 병원장은 그렇게 표현했다) 것이 된다. 반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의약품 부족이다. 각 병원은 전쟁 전 몇 달간 쓸 의약품을 비축해 놓았는데 그것이 곧 바닥날 예정이다. 따라서 지금 시급한 일은 의료진이 아니라 의약품을 보내는 일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점은 이라크가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다. 지금으로선 그곳 지식인들이 바라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란과 같은 이슬람 독재로 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보인다.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기반이 튼튼해야 하는데 이라크의 시민사회는 그동안 거의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세인 독재의 최대 후유증이다. 그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육성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비정부기구(NGO)들은 이 일을 할 수 없다. 이라크 국민의 반미감정이 보통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 NGO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라크 국민의 눈에는 모두 석유만 노리는 서구 열강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에 대해서는 대환영이다. 이들이 한국에 대해 이토록 좋은 감정을 가진 데는 지난번 월드컵대회 때 한국의 4강 진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이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본 적이 없는 착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27년간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이룩했는데 바로 이 경험이 지금 이라크에 필요한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8개의 한국 NGO팀이 활동할 때 일본은 단 한 팀밖에 오지 않았다. 암만에서 만난 한 미국 NGO 대표는 자기들 대신 한국 NGO가 이라크에서 열심히 일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이라크 시민운동의 육성을 자기 일로 생각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의 NGO뿐만 아니라 경제정의, 환경, 여성, 교육, 반부패 등 다양한 과제를 다루는 NGO들이 이번 기회에 이라크에 적극 진출해 시민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이라크에 민주주의의 희망이 생기게 된다.

지금 한국 기업들은 이라크가 중동특수처럼 한국 경제 활성화에 계기가 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점령국인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 못지않게 이라크 국민의 친구가 되어 사심 없이 그들의 민주주의 성장을 돕는 일을 해야 한다.

서경석 '이라크 난민돕기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