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非常]<1>위기의 수출산업…문닫은 '대구섬유'

  • 입력 2003년 5월 19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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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수치로 나타난 지표보다 체감경기는 더 나쁘다. 최근의 경기 침체는 단지 경기순환에 따른 불경기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많다. 자칫 ‘성장엔진’이 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업 투자부진과 장기화되고 있는 청년실업 등이다. 한국 경제의 현 위치는 어디이며 갈 길은 어느 쪽인가? 동아일보는 전국 각지의 산업, 금융, 소비, 고용 등 생생한 경제상황을 현장에서 점검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시리즈를 통해 현상 분석은 물론 대안까지 찾아보고자 한다.》

15일 오후 대구 서구 비산동 염색산업단지는 평일 오후인데도 고요하기만 했다. 작년만 해도 큰길에는 직물을 실은 트럭이 분주하게 다녔으며 원자재를 내려놓고 완성품을 싣는 소리로 요란했다.

대구의 섬유산업을 대표하는 이 염색공단에는 110여개 염색업체들이 모여 있다. 그 중 하나인 세일화섬은 경비원 한 사람만 회사 입구를 지킬 뿐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작년 8월부터 휴업인데 언제 문을 다시 열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밖에도 최근 이 공단에서만 2, 3개 업체가 문을 닫았다.

▽썰렁한 분위기=전국이 불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곳 대구는 특히 더하다. 대구의 4월 어음부도율은 0.75%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대구 지역 수출의 50%를 차지하는 직물 수출은 1·4분기에 작년보다 13%나 줄었다. 단지 내 5대 업체인 쌍호염직. 공장 안마당은 물론 창고에도 아직 염색하지 않은 하얀 직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 원자재 상태로 쌓여 있는 직물들이다.

이 회사 정호언(鄭鎬彦) 총괄본부장은 “작년에 비해 공단 업체들의 평균 가동률이 60%가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에 70% 이상을 수출하고 있는 이 업체는 세계 경기가 어려워지고 납품 단가가 떨어지면서 작년 8월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설명. 정 본부장은 “남은 선택은 공장규모를 줄이고 인원을 축소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대구에서 가장 큰 성서공단 안에 있는 섬유기계 제조업체 ㈜텍스텍. 작년까지 연간 30%씩 성장하는 등 새로 부상하고 있는 회사다. 이 회사에도 마당과 창고에 직기 300여대가 포장 상태로 서 있었다. 최근 화물연대 파업으로 내가지 못한 제품들. 정수민(鄭秀敏) 사장은 “대기업은 1억∼2억원 수출차질을 빚어도 끄떡없지만 중소기업은 당장 쓰러진다”며 “물류비를 15% 올리겠다고 하는데 왜 협상은 정부가 하고 부담은 기업이 안아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중국으로 중국으로=중국으로 빠져나가는 수출업체들은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공업용 모터 등을 생산하는 D공업은 작년에 중국 칭다오(靑島)에 공장을 준공해 가동을 시작했다. 1997년 100만달러 수출을 달성했지만 계속되는 인건비 상승으로 작년에는 60만달러 수출에 그쳤고 결국 중국행을 택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남동공단은 앞으로 3, 4년 안에 생산시설은 없이 연구와 영업 분야만 남아 텅 빈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반도체 설비부품을 생산하는 E업체 고모 사장(42)은 “인력난을 이기지 못해 올 초 중국 상하이(上海)에 현지 공장을 세웠다”면서 “생활정보지, 노동부 고용안정센터 등 백방으로 사람을 알아봤지만 현장 인력 10명을 구하지 못해 항상 주문량에 쫓겨야 했다”고 말했다.

경기 시화공단 내 D엔지니어링은 중국이 최대 수출시장으로 떠오르면서 수출기간 단축과 인건비 절감 등을 위해 중국 선양(瀋陽)에 공장을 신설하고 현지 인력을 국내에서 훈련시키고 있다.

인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남동공단 3600여개 제조업체 가운데 중국에 직접 또는 합자 방식으로 진출한 업체는 70여개. 앞으로 3년 안에 200여개 업체가 추가로 중국에 진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전체 수출 실적은 아직 괜찮은 편이다. 올 들어 이라크전쟁과 사스 등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4월에는 작년 같은 달보다 수출이 20.3% 늘어 4개월 만에 흑자로 반전됐다.

그러나 수치상의 지표와 실제 기업들의 체감경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수출산업 호황은 자동차 휴대전화 선박 등 극소수 업종에 편중돼 있다.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의 업종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평균은 유지된다. 그나마 5월부터는 기술적 반등 효과도 사라질 전망.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경기가 하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 기업하려는 의욕을 격려하지 못하는 정책적 난맥상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기업 스스로 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아 고객을 확보하는 ‘새로운 성장잠재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

대구상공회의소 임경호 기획조사부장은 “자동차 기계 등은 비교적 괜찮지만 주력산업인 섬유를 대체할 뾰족한 산업이 형성되지 않아 지역경제가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진희 박사는 “이탈리아의 패션 섬유산업이 첨단화해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데서 보듯이 업종별로 사양산업과 첨단산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면서 “현재 한국의 수출산업은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생산성 향상과 투자를 통한 경제성장은 기업이 주력이 되어야 하며 정부는 불필요한 규제를 풀어 기업들이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고 느끼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우주통신 성공사례…'고객 맞춤형'으로 발빠른 변신▼

인천 남동공단에서 보안장비인 디지털영상기록장치(DVR)를 주로 생산하는 ㈜우주통신은 일찌감치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매출의 90% 정도를 수출한다.

DVR는 아날로그방식의 폐쇄회로(CC)TV를 디지털방식으로 대체하는 기기로 세계시장 규모는 연간 3조7000억원.

이 회사가 ‘잘 나가는 수출기업’으로 우뚝 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시장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고 있다.

이 회사와 거래하는 현지 바이어들은 세계 시장의 변화와 고객의 제품 요구 등 최신 정보를 실시간으로 타전한다. 80여개국 180여개 바이어들과 끈끈한 믿음으로 맺어져 ‘세계에흩어진 현지 지사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이 회사 김형태 사장(52)은 1992년 회사를 설립한 뒤 세계 곳곳을 뛰어다녔지만 메이저 바이어를 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공략 대상을 마이너 바이어들로 바꿨다. 10개 이하의 소량 주문도 성심껏 받았다. 홍보를 위해 들고 간 제품을 무료로 나눠 주기도 했다. 틈새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신뢰를 쌓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 이때부터 바이어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이 회사의 최대자산인 ‘거래 네트워크’는 이렇게 형성됐다.

물론 성실과 함께 ‘상품성’이 뒷받침돼야 신뢰가 쌓인다.

우주통신은 DVR 외에 감시용 카메라, 센서, 모니터, 케이블 등 보안장비 시스템에 필요한 일체의 장비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

아날로그방식의 CCTV부터 최첨단 디지털 영상장비에 이르기까지 일괄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 이는 탄탄한 기술력 덕분에 가능하다.

50여명의 연구 인력이 미주연구소, 서울연구소, 인천연구소 등 3개 연구소에 투입돼 세계 시장과 고객 중심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현지 특성에 맞는 ‘맞춤형 제품’을 만들어 글로벌 마케팅을 펼칠 수 있도록 한다.

이 회사는 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이 아닌 자체 브랜드 ‘씨-유’(SeeU)로 전 세계에 공급하고 있다. 안전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보안 감시 장비시장에서 이 브랜드는 이미 신뢰를 구축했다.

물론 이 회사라고 고민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최첨단 제품의 개발을 위한 인재가 더 필요하지만 우수인력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바람에 외국인 인재를 고용할까 고려할 정도.

“세상의 변화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남다른 기술력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안주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김 사장이 말하는 수출의 비결이었다.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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