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21…명멸(明滅)(27)

  • 입력 2003년 5월 21일 18시 16분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얼굴을 약간 돌려 왼쪽 가슴에 귀를 대었다 내 가슴의 고동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볼과 이마에 하얀 솜털이 붙어 있었다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나도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그녀는 숨을 들이쉬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노랫소리가 나오기 직전에 눈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노래의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목련향 같은 선율에 귀기울였다

꽃을 사시오 꽃 사 꽃을 사시오 꽃을 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에 꽃이로구나

꽃바구니 을러메고 꽃 팔러 나왔소

붉은 꽃 파란 꽃 노라고도 하얀 꽃

남색 자색에 연분홍 울긋불긋

빛난 꽃 아롱다롱이 고운 꽃

갑자기 물 속에 처박힌 것처럼 몇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그 물을 마시지 않으려고 숨을 멈췄지만 기억의 세부는 분류가 되어 밀려왔다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신랑 다루기 때였다 그녀는 아이를 잉태한 배에 두 손을 살며시 올려놓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녀의 증조 할배의 손을 잡고 춤췄다 그 맑은 노랫소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에 꽃이로구나 종달새처럼 목청을 돋우고 애정을 담아 날갯짓한 3월의 신부 나의 아내여 나는 그녀의 인생에 뛰어들었고 그녀 역시 내 인생에 뛰어들었다 12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고 네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지금은 소식조차 모른다 눈꺼풀에 새겨져 있는 아내의 모습 슬픔에 속이 썩어 들어간 아내 눈물을 참느라 입술이 뒤틀린 아내 웅크린 등에 들먹이는 어깨

B29의 배기가스를 보거나 엔진소리를 들으면 당장에 유선통신으로 부산 방공감시소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머리 위에는 뿌연 달이 떠있을 뿐이다 보름달 같기도 하고 어디가 조금 일그러진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망원경으로 달을 들여다보았다 아래쪽에 부옇게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다 7월의 바람을 타고 소나무 숲에서 솔내가 풍겨온다 하루종일 내린 비가 솔가지와 솔잎을 적시고 솔내를 꾀어낸 모양이다 나는 짙은 솔내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큐우 파아 큐우 파아 영남루 산꼭대기에 있는데 강물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린다 콸콸콸콸 콸콸콸콸 밤에는 강도 하늘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다시 망원경을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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