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에 일감이 없다는 것은 ‘요즘 설비 투자가 안 된다’는 뜻이다. 즉 볼트 너트 생산은 설비투자의 ‘지표산업’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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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얼어붙으면서 부산 지역에서는 생산설비 관련 기업의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까지 감소했다. 신평장림공단에서 공업용 기계를 제작하는 A사 이모 부장(49)은 “20년간 중소기업에서 일해 왔지만 요즘같이 어려웠던 적은 없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의 설비 투자 정도를 보여주는 제조업 유형자산 증가율은 지난해 -1.8%를 나타내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0년 이후 가장 낮았다. 유형자산 증가율은 91년부터 98년까지 매년 11∼20% 수준을 유지해 왔지만 99년 이후 크게 낮아져 2001년에는 -1.5%까지 추락했다.
투자할 여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국내 제조업체의 현금 보유액은 46조원. 2001년 말(32조6000억원)에 비해 41.1% 증가한 수치다(한국은행 통계). 제조업체의 총자산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말 7.9%로 77년 말(8.1%)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았다.》
▽왜 투자를 안 하나?=그렇다면 기업은 왜 돈을 쥐고만 있을까. 무엇보다 경기전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내수부진과 함께 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는 것. 이라크전쟁이 단기에 종결됐지만 세계 경기는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북핵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다 최근의 물류대란까지 겹쳐 국내 기업들의 투자 심리가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성장산업이나 투자수익률(ROI)을 맞출 만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핵심적인 요인. 화학과 건설이 주력업종인 이수그룹은 최근 21세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업모델을 찾느라 고민이다. 김성민 기획실 전무는 “공장에서 원가 절감 운동을 해 생산 단가를 아무리 끌어내려도 중국 업체가 시장에 들어와 시장가격이 한꺼번에 30%씩 떨어져 버리는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 국내 인건비가 중국의 7∼10배까지 되는 상황에서 설비를 늘려 ‘규모의 경제’를 통해 원가경쟁력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대신생명 인수를 통해 금융업 진출을 노리던 이수그룹은 국내에서 다른 업종의 제조업체에 대한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한편 호텔이나 레스토랑 등 고급 서비스업종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ROI를 따지는 과학적 투자관행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투자를 까다롭게 하는 요인이다. ROI는 기업 순이익을 투자액으로 나눈 값으로 단위 투자를 통해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 살펴보는 경영지표. 투자성과를 꼼꼼히 따지다 보니 과거처럼 사업을 무모하게 벌여놓는 투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국내 대기업의 한 임원은 “정부가 재벌이나 노사문제와 관련해 기업을 위축시키는 언행을 불필요하게 많이 해 투자심리가 얼어붙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할 의욕을 툭툭 꺾어놓는다는 것이다.
▽해외진출 러시=국내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다 보니 신규투자가 국경을 넘어간다. 제조업의 해외진출 러시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국내 대기업의 해외공장 추진 발표가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국내에서 생산설비 투자를 늘릴 계획이 없다는 점. 미국 앨라배마에 현지 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인 경우다.
제조업 위주로 사업을 확장해온 H그룹 계열사의 한 사장은 최근 “앞으로 2, 3년간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유보키로 했다”고 밝혔다. 중장기적으론 금융업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면서 제조업 비중을 축소할 계획이다. 그는 “제조업으론 수익률을 맞추기가 너무 어렵다. 장기적으로 제조업에선 ‘세계 톱 10’ 수준의 메이저 업체가 아니라면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본다”고 털어놓았다.
제조업체가 국내생산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힘들 경우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외진출은 무역장벽을 피해가는 해법이기도 하다. 제조업의 생산기지 해외이전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이미 경험했던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런 보완책 없이 해외로 빠져나가다 보니 국내총생산(GDP)이 낮아지고 실업 문제가 불거지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개별기업으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했지만 국민경제는 침체하는 ‘구성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해법은 없나=이 와중에서도 삼성전자나 LG전자는 올 들어 국내 생산라인을 증설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이나 2차전지 등 차세대 첨단기술이 있다면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술 우위를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인 셈.
또 다른 접근법도 있다. 산업연구원(KIET)의 박중구 동향분석실장은 “일본의 경우 해외투자가 늘어도 국내투자가 줄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해외 생산기지가 고부가가치 부품만은 일본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해외생산이 늘면 덩달아 국내생산도 늘었다. 전래 업종은 해외로 돌리면서 국내 생산시설은 고부가 첨단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삼성전기의 국내외 생산기지에 대한 ‘이원화 경영’은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해 삼성전기 8개 해외 공장의 매출액은 16억7700만달러(약 2조원)로 회사 전체 매출액의 60%를 차지했다. 하지만 회사의 해외투자액은 700억원으로 전체 투자액의 35%에 그쳤다. 오히려 2001년 39%에 비해 비율이 줄었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공장은 최첨단 제품의 연구·개발 및 생산기지로, 해외 공장은 범용제품 생산기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 회사 강호문 사장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것은 이해하지만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내외 공장 사이의 분업화와 네트워크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
부산=조용휘기자 silent@donga.com
▼신발업체 ㈜성호실업…고어텍스 등산화등 신기술로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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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산업은 노동집약적인데다 자동화가 어려워 사양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때 부산의 경제를 좌우했던 많은 신발업체들은 국내 생산시설을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 임금이 싼 지역으로 옮겼다.
그러나 부산 사상구 삼락동에 있는 ㈜성호실업은 과감한 기술투자를 통한 신발혁명을 꿈꾸고 있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한 신발은 신을 것이며 사양기업은 있을지라도 사양산업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이 회사는 1992년 스키부츠처럼 딱딱하고 공기도 잘 통하지 않던 플라스틱 인라인 스케이트 부츠를 경등산화용 재질로 바꾸고 내피도 없애 가벼우면서도 공기가 잘 통하는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으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현재 세계 인라인 스케이트 시장의 15%를 점유하고 있다.
93년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켜 개발한 스노보드화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 그전까지 안쪽과 바깥쪽이 분리된 투피스 구조여서 신고 벗기가 불편했지만 성호실업이 원피스 형태로 개발해 전세계 스노보드화 시장의 판도를 확 바꿔놓았다.
95년에는 국내 최초로 고어텍스를 적용한 등산화를 개발해 등산화는 무겁고 투박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고 97년에는 ‘하이퍼그립’이란 아웃솔(밑창)을 독자기술로 개발해 전제품에 적용, 국내 신발업계의 수입 대체에 한몫을 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세계적 브랜드가 석권하고 있는 신발시장에서 이 회사는 ‘트랙스타’라는 독자 브랜드로 특수화분야에서만큼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신발업체다.
한해 평균 360만켤레의 등산화와 인라인 스케이트, 스노보드화, 아웃도어 슈즈를 생산해 이 중 300만켤레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수출실적만도 1억6000만달러에 이른다.
권동칠 사장은 “세계시장에서 살아남는 길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신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라며 “평범한 것보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차별화된 제품 개발만이 국제 경쟁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조용휘기자 silent@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연수 임규진 홍찬선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박중현 홍석민 신치영 이헌진 이나연기자
▽사회1부=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기자
▽사회2부=차준호 남경현 황금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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