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에 가둔 인간의 몸으로부터 생체 에너지를 뽑아내 작동하는 컴퓨터(매트릭스)가 인간의 뇌를 조작해 가상현실 속에 살게 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세계 종교학자와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가 ‘본말이 뒤집힌 마케팅 기법’을 활용해 또 다른 화제를 낳고 있다. ‘제휴마케팅’의 새 장을 연 것이다.
▽또 하나의 트렌드, 멀티 플랫폼=앤디와 래리 워쇼스키 감독은 매트릭스 2, 3편을 제작하면서 △애니메이션 △게임 △게임 속에 들어갈 1시간 분량의 별도영화를 동시에 제작했다. 멀티 플랫폼 기법이다.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게임을 하지 않고서는 영화 자체를 심도있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해 소비자들이 마치 ‘진리를 구하듯’ 난해한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 제품 저 제품을 사며 탐구하도록 유도한 것.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군 장교역의 송강호가 “내 꿈은 말야, 언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거야”라며 초코파이를 한 입에 먹자 초코파이 매출이 10% 증가했다. 그러나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는 영화가 제품 판매를 증가시켰는지, 이들 제품 때문에 영화 관객이 늘었는지 알기 어렵다.
▽상품은 영화의 일부분=그동안 영화 속에 상품을 등장시키는 간접광고(PPL·Product Placement)는 상품 노출에서 끝나는 정도였다. 또 제휴마케팅도 가령 ‘맥도날드 배트맨 세트’와 같이 상품과 영화의 인지도만 서로 이용할 뿐, 햄버거(상품)와 영화는 별 상관관계가 없었다.
반면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는 PPL에 사용된 상품이 없이는 영화가 되지 않고, 영화가 없이는 상품이 팔리지 않는 기이한 구조로 영화 기획 단계에서부터 영화 속 상품의 위치와 상품 판매를 통한 영화 홍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배우들이 대본을 보기 전부터 준비된 일. 처음 있는 시도다.
삼성전자, 제너럴모터스(GM), 하이네켄 맥주, 듀카티(오토바이 업체) 등은 영화 개봉을 전후해 일제히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들 광고는 ‘영화에 우리 제품이 나온다’는 메시지보다는 ‘매트릭스를 보라’는 식이었다. 제품이 아니라 영화장면을 내보낸 것. PPL 기업들이 앞장서서 영화 홍보에 나서고, 영화가 뜨면 자연히 제품이 팔리는 상호작용을 노린 것이었다.
▽소품의 자격=돈을 많이 낸다고 영화에 소품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트릭스 제작진은 ‘사이버틱한’ 영화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는 제품 이미지를 까다롭게 골랐다. 캐딜락은 ‘나이든 부자들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GM이 최근 내놓은 ‘캐딜락 CTX’는 자칫 손이라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디자인으로 강렬한 인상을 줬다. 추격 장면에서 캐딜락 CTX는 10대가 박살이 났고, 국내에서 영화 개봉 전 한 달에 5대밖에 안 팔리던 판매량이 60대로 수직상승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말 세계 최대 경매사이트인 e베이(www.ebay.com)에 매트릭스폰(영화에 나오는 휴대전화) 1대를 시험 삼아 내놓았다. 영화에 등장한 매트릭스폰의 인기를 가늠해보려는 것. 한정판으로 제작한 매트릭스폰의 미국 현지 판매가격은 500달러. 그런데 매트릭스 마니아들이 몰려들면서 이 제품은 2325달러에 낙찰됐다. 매트릭스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11월 개봉 예정인 3편에도 등장하는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는 영화 개봉 후 미국 최대의 이동통신사업자인 바라이존에 공급하기로 계약을 했다.
▽소품은 광고가 아닌 콘텐츠=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소비자들은 이제 이성이 아닌 감성에 의해 구매결정을 한다”고 설명했다. 제품의 장점과 기능을 아무리 세세하게 설명해 봤자 ‘필(feel)이 꽂히는’ 상품이어야만 구매하며, 소비자들의 감성을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는 것은 영화 노래 등 문화상품이라는 것.
피아(彼我) 구분이 모호한 공동 마케팅.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빠른 시간에 회수할 수 있는 ‘매트릭스 마케팅’이 앞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일반적인 마케팅 기법으로 자리 잡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나성엽기자 cpu@donga.com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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