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했던 경제운용=정책혼선의 핵심은 리더십 부재(不在)였다. ‘경제팀 수장(首長)’인 김 경제부총리에게 힘이 실리지 못했고 김 부총리 본인 역시 경제 현실과 무관하게 이른바 청와대의 ‘코드’에 휘둘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랫동안 갈팡질팡하다 ‘인하 적극 검토’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법인세율 문제.
김 부총리는 취임 직후 경기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감안해 “새로운 세원(稅源)을 발굴하고 대신 법인세율을 낮추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곧바로 청와대와 일부 정권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법인세율을 인하하면 대기업만 이익 본다’ ‘새 정부의 이념과 맞지 않다’는 반박이 쏟아졌다. 노 대통령도 “법인세율 인하는 전체적인 재정구조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해야 한다”며 신중한 접근을 지시했다. 경제부총리의 지휘봉에서 힘이 쭉 빠지는 순간이었다.
이 밖에 △금리인하 등 단기부양책 필요성 △출자총액제한 제도완화 △접대비 사용한도 등 경제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 여러 차례 오락가락해 기업 일반국민 등 경제주체를 불안하게 했다.
경제 분야에서 최하의 낙제점은 노사관계에서 나왔다. 현 정부는 출범 직후 두산중공업 파업 조정 과정에서 법과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이는 곧바로 철도파업, 화물연대 운송거부라는 더 큰 사태로 이어졌다.
▽경제 성적표는 ‘바닥권’=새 정부는 경기하강 곡선에서 출범해 다소 핸디캡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성적은 예상보다도 더 나빠졌다.
3월27일 열렸던 경제장관회의에서는 이라크전쟁 장기화 조짐, 북핵 문제 등 대내외 여건이 불리하지만 1·4분기(1∼3월) 경제성장률이 4%대는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3.7%에 그쳐 지난해 4·4분기(10∼12월)의 6.8%에 비하면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더구나 출범 후 본격적인 성적표라 할 2·4분기(4∼6월) 성장률은 1∼2%대로 주저앉을 것이라는 게 국책연구기관을 포함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더 심각한 것은 기업 소비자 등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조사한 5월 제조업 경기실사지수(BSI)는 75로 전월의 77에 비해서도 나빠졌다. 6개월 후의 경기와 생활형편 등을 나타내는 소비자기대지수는 4월 현재 94.5로 모두 100보다 낮았다. 기업은 새로 투자할 의욕이 없고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겠다는 뜻이다.
이 밖에 카드채, SK글로벌 향방, 조흥은행 택시·버스·레미콘업계 등 대형사업장의 노사분규 움직임 등 간단치 않은 현안이 여전히 한국경제의 뇌관(雷管)으로 남아 있다.
▽개혁과제는 추진 중?=현 정부는 출범 후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겠다며 대기업개혁, 구조조정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이에 따라 상속·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 재벌계열 금융기관에 대한 계열분리청구제 등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 투명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증권관련 집단소송제의 법제화도 준비 중이다. 조흥은행 매각작업은 청와대 개입으로 논란이 있었으나 매각한다는 원칙엔 변함이 없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출범 전부터 주요 개혁과제로 추진해 오던 민영화작업은 새 정부 들어 크게 후퇴했다. 주공 토공의 통폐합, 철도민영화는 이미 무산됐다. 한전의 남동발전소 매각도 지지부진하며 가스공사 설비부문 민영화는 사실상 백지화됐다.
▽현실경제로 선회 움직임=정부가 최근 현실경제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 대통령은 방미를 전후해 대기업 총수 등 경제계 인사들과 잇따라 만나 투자를 요청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면 서민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면서 “대기업이 투자를 많이 해야 경제 분위기가 살아난다”고 강조했다. 취임 후 외교 안보분야에서 냉정한 현실국제관계를 감안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방미 중 ‘친미(親美)성 발언’을 한 것과 같은 맥락.
하지만 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시하는 현 정부의 기본 경제철학을 감안하면 이러한 현실중시 경제운영방식이 얼마나 지켜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전문가 조언▼
경제전문가들은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경제 정책을 ‘반(反)시장원리’와 ‘비(非)일관성’, ‘비전 부재(不在)’로 요약했다. 특히 철도노조와 화물연대 파업에 대처하면서 보여준 ‘끌려 다니기’식 선례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념(陳稔) 전 경제부총리는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경제 정책에 대한 총평은) 요즘 신문에 나온 그대로다”며 “아직 100일밖에 안돼 평가하기는 그렇다”고 말을 아꼈다.
다만 노동 정책과 관련해서는 “근로자를 위한 정책과 노동조합을 위한 정책은 분명히 다르다”며 “(현 정부의) 노조 문제 처리에 대해 외국인들도 우려를 갖고 보고 있다”고 경고했다.
경희대 안재욱(安在旭·경제학) 교수는 기업 정책에 대해 “기업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체질을 바꾸기 마련”이라며 “정부의 역할은 시장 시스템이 잘 작동하기 위한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지 지금처럼 기업에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늦게나마 법인세율 인하 적극 검토 등 기업 활동을 고양시키는 대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이 같은 정책기조를 끝까지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최공필(崔公弼)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재벌을 지금 모습으로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소유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칼을 빼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현 정부의 경제 정책팀은 준비가 안 된 인상을 줄 뿐더러 손발도 맞지 않는다”며 “당장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민단체도 정책의 일관성과 세련된 운용을 촉구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위평량(魏枰良) 사무국장은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가 나중에 금리를 내리는 행위 등 시장 참여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정책이 많았다”고 꼬집었다.
노조 문제에 대해서도 “화물연대만 해도 조기 수습이 가능했지만 운용 미숙으로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YS-DJ 취임 초기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 이후 100일간 경제운용에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정부의 친(親)노조 성향과 정책 불확실성으로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고 있고, 주저앉는 경기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 SK글로벌 사태와 카드채 부실 등 금융시장 불안 요인도 여전히 남아 있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취임 초기 경제 운용 성적표는 어땠을까.
YS가 취임한 1993년 2월에는 1년간 침체에 빠져 있던 경기를 활성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경제 현안이었다.
YS는 그해 3월 9일 강도 높은 경기부양책을 담은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놓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따라 경기는 93년 하반기(7∼12월)부터 급상승세로 돌아섰고 96년 3월까지 호황을 이어갔다.
그러나 금융과 기업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체질 개선 노력을 소홀히 해 임기 말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퇴장했다.
DJ는 당선자 시절부터 국가경제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데 주도적으로 나섰다. 취임 후에도 경제대책조정회의 등을 통해 직접 경제를 챙겼다.
대통령이 너무 나서는 바람에 관료조직이 무사안일에 빠지고 지나친 긴축정책으로 과도한 실업과 경기 불황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국가부도’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는 점에서 DJ의 초기 경제운용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DJ는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면서 부동산시장 부양과 소비 촉진에 매달려 가계 부실과 부동산투기 붐이라는 ‘짐’을 노무현 정부에 넘겼다.
두 전임 대통령은 결국 취임 초기의 성과에 도취해 임기 말 종합성적표는 신통치 않았다. 노 대통령은 초기에 보여준 실패를 교훈삼아 장기적으로 성공하는 경제 대통령이 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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