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사장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고로(용광로) 아랫부분의 출선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불을 지핀 지 만 하루, 성공이냐 실패냐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직원들도 다들 숨을 죽였다. 마침내 출선구가 열리자 밝은 오렌지색 섬광이 몇 미터쯤 치솟았다. 불꽃이 천천히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용암처럼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흘러나왔다. “와, 나온다. 만세! 만세!” 직원들은 너나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풀 한 포기 없는 모래밭에서 바닷바람과 싸우며 전쟁 같은 작업을 벌인 지 만 5년째,
처음으로 현대식 제철소에서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2003년 6월 포항제철소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지금도 고로는 쉬지 않고 쇳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5일 포항제철소에서 기자는 높이 110m의 제4고로가 토해내는 붉은 쇳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크다는 이 4고로에서 만들어지는 쇳물은 하루 9000t. 소형 승용차 1만대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포항제철소를 찾는 사람들은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서울 여의도의 3배에 이르는 270만평의 거대한 부지에 도로의 길이만 80km가 넘는다. 높이 100m쯤 되는 거대한 굴뚝이 즐비하고 바다를 사이에 낀 거대한 U자형의 부두에 축구장만한 선박들이 정박해 있다.
원료 부두 야적장에는 검붉은 가루가 작은 언덕을 이루고 쌓여있다. 철광석이었다. 저 철광석을 코크스와 함께 용광로에서 녹이면 쇳물이 된다. 이후 탄소를 뽑아내는 제강과 제품형태를 갖추는 압연 공장 등을 거쳐 완제품이 나오게 된다. 완제품들은 성질에 따라 선박이나 자동차, 가전제품 등의 껍데기가 되기도 하고 건물의 뼈대가 되기도 한다. 정보화니 디지털시대니 해도 인류는 기원전 4세기 이후 여전히 철기시대를 살고 있고 포스코는 철기 문명의 중심축이다.
#우리는 ‘대장장이’
초여름의 바깥 기온은 섭씨 30도에 육박했다. 하지만 2000도에 이르는 쇳물에 비하랴. 열연 공장에서 기자는 붉게 달궈진 코일이 컨베이어에 실려 지나갈 때마다 ‘훅’ 하고 밀려오는 열기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곳 현장에서 만난 포스코인들은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한국은 철광석은 호주 브라질 인도에서 수입한다. 석탄은 호주 중국 등에서 사온다. 그렇게 쇠를 만들고 자동차와 배를 만들어 호주 등 세계에 수출한다. 2000년 전 가야인의 제철기술, 노하우가 우리 핏줄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냉연부 조병천 총괄(과장)은 “용광로의 불은 24시간, 365일 꺼뜨릴 수 없다. 입사한 지 16년이 넘었지만 주위에서 결근하는 직원을 본 적이 없다. 비가 많이 와서 출근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아예 회사에서 잠을 잔다. 제철소가 멈추면 철로 제품을 만드는 고객사는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포항제철소는 공장에 따라 설비를 점검할 때를 제외하면 4조3교대로 일년 내내 쉬지 않고 돌아간다.
민경준 2열연 공장장은 “지금은 몇 마이크로미터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한 공정”이라며 허허 웃었다. 그는 전날 꼬박 밤을 새우고 아침에 들어갔다가 오후 2시에 다시 사무실에 나온 참이었다.
#변화와 도전
그런 포스코에 최근 세계 경영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99년부터 추진해온 생산과정관리의 혁신 때문이다. 이름하여 PI(Process Innovation). PI가 도입된 후 변화는 놀라웠다. 주문에서 선적까지 납기가 30일에서 14일로 줄었다. 세계의 모든 제철소 가운데 가장 빠르다.
재고 역시 절반으로, 4년 걸리던 신제품 개발은 1년6개월로 줄었다. 이런 혁신을 이루면서도 단 한 명의 해고도 없었다. 사람을 줄여 효율성을 높이는 대신 직원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혁신이 진행된 것이다. 지배구조나 경영의 투명성을 위해서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업계의 도전과 새로운 사업 모델 발굴 등을 포스코가 중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제철소 내 한 사무실 벽에는 ‘입수 보행 금지’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훈련소 이후 처음 보는 글귀였다.
맨주먹으로 허허벌판에서 일궈온 기적을 자율과 창의성이 중시되는 디지털시대에 어떻게 이어나갈지가 포스코에 남겨진 숙제다.
포항제철소=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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