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전쟁영웅들을 기억하자

  • 입력 2003년 6월 23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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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스타들이 영화 촬영 때 가장 선호하는 의상은 군복이라고 한다. 국가를 위해 용맹스럽게 전투를 벌이고, 그래서 관객의 뇌리에 영웅으로 남게 될 군인의 배역을 맡고 싶어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군복은 명예를 뜻하고 군의 존재는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상징된다.

이런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전장에 나가면 평균 3분의 1이 희생되는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기병대에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군인의 죽음을 기리고 유족을 보살펴주는 국가를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 억지 수단 軍… 사기 높여야 ▼

보스니아 전장에서 실종된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미국은 항공모함을 돌려 40대의 전투기와 600명의 해병원정대를 투입하고 대통령이 직접 작전을 지휘해 악착같이 살려내 오는 나라다. 한국전이 끝난 지 반세기가 더 지나도록 북한 땅에 남은 미군 유해를 찾기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국가가 군인 한 명의 목숨을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는 나라에서는 젊은 병사들이 용맹스러워지고 그 결과는 승리로 이어진다. 이런 사회라면 멀쩡한 젊은이들이 입영을 피하려고 온몸에 흉측한 문신을 새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5·16군사정변 이후 이 땅에도 군인들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군 출신들이 셋이나 내리 대통령직을 차지했고 그럴싸한 자리는 깡그리 예비역 장성들에 점령됐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후유증으로 군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만연하면서 상무정신은 사라지고 군에 대한 존경심은 땅에 떨어졌다. 그 옛날, 이 다음에 ‘대장’이 되겠다고 하던 어린이들의 웅대하던 꿈은 요즘 연예인이나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식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국방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국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와 안보다. 우리 같은 분단국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투자를 지켜줄 국방이다. 특히 북한이 핵을 갖고 있다고 공언하는 요즘, 이 땅에서 전쟁을 억지하는 유일한 수단인 군은 그 어느 때보다 존재와 역할이 강조된다. 이런 나라에서 군을 소홀히 취급하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면 기다리는 것은 국가적 재앙뿐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오랫동안 군대의 중요성과 군장병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일이다.

내일은 6·25전쟁 발발 53주년이 되는 날이고 닷새가 지나면 서해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해군영웅들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주년이 된다. 서해교전 후 한 해를 보냈지만 나라를 위해서,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친구 생일잔치 가는 길에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다 간 것이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적의 포탄에 희생된 것이거늘 당시 대통령은 그들이 하늘나라 가는 길을 외면했고 지금 우리 사회는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유족들을 까맣게 잊고 있을 때 남의 나라 군대 지휘관인 유엔군사령관 미7함대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이 여러 차례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우리는 고마워해야 할 것인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인가.

전쟁영웅과 그 가족들이 이런 대우를 받는 나라라면 생명을 바쳐 지킬 가치가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군대는 사기를 먹고 사는 집단이다. 부동산투자로 떼돈 벌 기회도 못 갖고, 강남 특구에 자식교육 한번 맡겨보지 못한 채 임지에 따라 이사다니며 청춘을 국가에 바친 우리의 군인들. 오늘도 산간오지에서, 망망대해에서 밤을 새우며 나라를 지키는 간성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국가의 정성어린 보상과 국민의 뜨거운 성원이다.

▼서해교전 전사장병 위해 촛불을 ▼

천국에 먼저 간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서후원 중사, 황도현 중사, 박동혁 병장, 그리고 이희완 중위를 비롯한 18명의 부상 장병과 당시 전투에 참가한 해군장병 등 서해교전 영웅들에게 우리가 진 빚은 크다. 그 빚에 정부가 무심하다면 국민이라도 나서야 한다. 6월 29일, 그들을 위해 촛불을 높이 들고 이제부터라도 전쟁영웅들을 제대로 대접하겠다는 다짐을 하자. 그리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 모두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자. 그것이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드는 길이다. 삼가 고인이 된 6·29 영웅들의 명복을 빈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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