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보통 사람’인 뮌스터의 노후 생활계획표다. 하지만 지금 유럽의 30, 40대는 이런 노후를 꿈꾸기 어렵다. 국가연금에 노후를 기대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뮌스터씨는 “칠레나 호주에 여행 한번 못 갈자식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유난히도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유럽 대륙을 연금개혁 논란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프랑스 공공근로자들은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발해 5월 13일부터 한 달여 동안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초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전차가 사상 처음으로 이틀간 멈춰선 원인도 연금개혁이었다.
1990년대 초 본격화된 유럽의 연금개혁은 올 들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시발로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 다른 국가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본보 취재팀이 만나본 유럽인들은 연금개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나름의 대응책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제도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국가연금 개혁의 배경=독일 알리안츠그룹 경제연구소의 레나테 핀케 박사는 “유럽의 연금 위기와 최근 금융시장 변화의 원동력은 인구학적 변화”라고 단정했다.
2000년 16∼26%에 머물던 유럽 각국의 고령자부양비율(15∼64세 인구 대비 65세 인구의 비율)은 2050년 35∼62%로 급증할 전망이다. 젊은 근로자들한테서 돈을 거둬 퇴직자들에게 연금을 주는 현행 연금제도 아래에서 이 비율의 증가는 연금재정의 균형을 맞추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연금 재정의 불균형은 재정적자로 연결된다. 그리스의 연금 관련 재정지출은 2000년 국내총생산의 12.6%에서 2040년에는 23.8%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독일은 11.85%에서 16.6%로, 프랑스는 12.1%에서 15.8%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재정적자 증가는 ‘재정정책에서 보조를 맞춰 유로화의 안정을 기한다’는 유럽통합의 1차 목표 달성에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런 배경 아래 유럽 각국은 국가연금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을 동시에 단행중이다. 최근 유럽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개혁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국가연금 개혁의 방향=스위스 연금 컨설턴트인 베르너 누스바움 박사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르지만 목표는 연금 지급 개시 시점을 늦추되 보험료율을 높이고 지급률을 낮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여성과 고령자의 노동시장 참여율을 끌어올리고 기업 및 개인연금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개혁의 방향이다.
프랑스는 공공부문 근로자의 연금보험료 갹출 기간을 현재의 37.5년에서 40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오스트리아는 최근 조기 퇴직 요건과 연금 산출의 소득 기준을 엄격히 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작년에 복지예산 감축, 고용시장 유연화, 의료보장 축소 등을 뼈대로 한 사회보장시스템 개혁 원칙(‘어젠다 2010’)을 선포한 독일도 구체적인 연금개혁안을 가다듬고 있다. 이탈리아와 영국도 은퇴 연령을 늦추는 개혁안을 추진중이다.
▽유럽인의 대응=“국가연금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노동 인구가 점점 더 줄어들어 연금을 제대로 못 탈 것이다.”(조엘 라피·32·스웨덴 여행사 직원)
평범한 유럽인들은 ‘노후 생계를 더 이상 국가에 의지하지 말고 나름대로의 살 길을 찾으라’는 정부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30, 40대들은 아직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데다 현실감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불릴 만한 투자 밑천이 적고, 마땅한 금융상품을 찾기도 어렵다”는 미카엘 타일 교수(빈대학 보험학)의 현실 진단은 냉혹하기만 하다.
“연금 위기는 프라이빗 뱅킹에 좋은 기회”(파트리크 피셔 도이체방크 프리이빗뱅킹부문 대변인)라며 은행들은 고객맞이 준비에 분주하지만 “월수입의 절반이 연금과 보험료로 나가는 데다 생계비를 지출하고 나면 1년에 외국여행 한번도 빠듯하다”(디트리히·52·고교 교사·독일 하이델베르크)는 게 서민의 푸념이다.
그렇다고 유럽인들은 대박을 꿈꾸지도 않는다. 독일 분데스방크에 따르면 2002년 독일 가계금융자산에서 주식관련 투자자산의 비중은 16.1%로 1999년(23.5%)은 물론 1991년(20.2%)보다도 낮다. 그나마 여유자금을 개인연금이나 민간보험에 넣어 퇴직 이후 국가연금 감소분을 보충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이처럼 연금 위기가 자신들의 노년을 비켜 가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이 요즘 유럽인들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런던=김용기기자 ykim@donga.com
프랑크푸르트·빈=이철용기자 lcy@donga.com
파리·스톡홀름=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스웨덴의 '수익연금제' 실험 ▼
‘이제는 공적연금도 내 손으로 직접 굴린다.’
스웨덴의 외무부에 근무하는 카를로 락소(47)는 요즘 자신이 고른 5개 펀드의 수익률 추이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노후대비용인 이들 펀드가 성공해야 은퇴 후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 적립식 펀드들은 락소씨가 매달 정부에 내는 공적연금 보험료의 일부로 운용된다. 즉 그는 자신의 공적연금을 직접 굴리고 있는 셈이다.
공적연금은 지금까지 매달 일정액의 돈을 내기만 하면 정부가 알아서 굴려주는 방식으로 운용돼 왔다. 일정한 수익률을 올려 은퇴 이후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1999년 스웨덴의 연금 개혁은 이런 개념을 엎어버렸다. 공적연금의 일부를 떼어내 개인이 직접 선택한 펀드와 펀드 매니저를 통해 투자하는 수익연금(premium pension) 제도를 도입한 것.
북유럽 복지국가 가운데 최초로 시도되는 이 시스템은 주변국들이 벤치마킹할 정도로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수익연금의 보험료로는 연금 보험료인 월급의 18.5% 가운데 2.5%를 떼어서 낸다. 국민은 1인당 최대 5개 펀드와 펀드 매니저를 선택할 수 있다.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때나 펀드나 펀드 매니저의 교체가 가능하다.
수익연금 관리청(PPM)에서는 각종 펀드의 종류와 성격, 위험도, 펀드 매니저의 실적 등을 소개한 자료를 보내준다. 개인들은 자료를 근거로 펀드를 선택해 PPM을 통해 자금을 관리하게 된다.
현재 PPM에서 활동하고 있는 펀드 매니저는 87명, 펀드 종류는 630여개에 달한다.
만약 개인이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못 고르겠다”며 운용을 포기하면 이 수익연금 보험료는 정부가 굴리는 AP펀드로 들어간다.수익연금은 최근 유럽 주식시장의 붕괴로 수익률이 좋지는 않은 상황. 정보기술(IT) 분야의 거품이 절정이었던 2000년 수익연금 제도가 시작된 탓에 현재 대부분이 30% 안팎의 손실을 봤다.
이 때문에 시행 첫해에 국민의 67%가 자신이 펀드를 직접 선택했지만 2001년에는 18%, 작년에는 14%로 줄어들었다.
PPM의 한스 요한슨 대표는 “노후대비용인 만큼 장기적으로는 주식시장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며 “수익연금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관심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스톡홀름=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스위스, 연금제도의 모범 ▼
유럽 대륙이 연금 개혁의 홍역을 앓고 있지만 유독 스위스만은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합리적인 연금제도를 완성한 뒤 현실에 맞는 개선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택이다.
스위스 연금제도는 ‘국가연금-기업연금-민간연금’으로 이어지는 3층 구조 사회보험시스템(three-tiered-system)의 모범사례다.
전국민노령유족연금(AHV)과 전국민장해연금(IV)로 이뤄진 1층 보장(기초보장)은 스위스 내 전체 거주자에게 노후 기초생계비를 보장해 준다. 평균 소득대체율(은퇴 전 소득 대비 은퇴 후 연금소득의 비율)은 35%가량.
미국의 기업연금에 해당하는 2층 보장(BVG)의 경우 근로자는 당연 가입하고 자영업자는 임의 가입한다. 소득대체율은 25% 정도.
3층 보장은 개인이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사적 연금 및 보험 상품 형태를 띤다.
스위스 연금제도의 강점은 한국이나 독일에서 한데 뭉뚱그려져 있는 사회보험을 둘로 나눈 데서 비롯한다. 스웨덴 덴마크 등 일부 다른 유럽 국가들도 스위스처럼 이원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는 세금으로 연금 재원을 마련하는 반면 스위스에서는 사회보험료를 걷는다는 점이 다르다.
김진수 강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가가 재정 부담을 적게 지도록 한 날렵한 시스템 설계가 두드러진 강점”이라고 말했다. 한국이나 독일처럼 국가가 많이 걷어서 많이 주는 나라에서는 예상치 못한 인구구조 변화가 엄청난 재정부담을 낳고 있는데, 스위스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재정 건전성을 바탕으로 스위스 연금제도는 모든 국민에 대해 최소한의 노후보장을 확실하게 해 준다.
특히 1층 보장은 탁월한 소득 재분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8.4%의 연금보험료를 내면 평균 소득층의 경우 은퇴 전 소득의 35%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게 된다. 빈곤층은 거의 100%의 소득보장을 받고 부유층은 1% 미만을 지급받는다. 갹출금의 상한을 따로 정하지 않은 점이 주목된다. 규모와 상관없이 소득의 8.4%를 무조건 내야 하는 것. 고소득자들은 그래서 국가연금 보험료를 ‘보험료의 탈을 쓴 세금’이라고 냉소적이다.
1층 보장에서 손해를 보는 부유층은 탄력적으로 설계된 2층 보장(기업연금)에서는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2층 보장에서는 소득 수준과 직장 근무 기간에 따라 연금 수준이 개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연금학자들은 스위스 연금시스템에서 국가-기업-민간이 기막힌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1층 보장은 국가가 맡고 2층 보장은 기업이, 3층 보장은 민간보험회사들이 담당한다. 2층 보장의 갹출 부담은 근로소득의 7∼18%에서 각 기업과 근로자들이 합의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또한 기업연금 기금의 투자수익률은 4% 이상 유지하도록 법으로 강제했다. 3000개가 넘는 공공 및 민간 운용기관이 기금 운용을 맡으려고 완전경쟁을 하기 때문에 수익률이 전반적으로 매우 높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마이너스 금리시대 실천재테크 ∏부-해외편 시리즈 순서>
1. 부모와 함께 하는 10대 재테크
2. 외화채권에 눈 돌리는 일본인
3. 입맛에 맞게 고르는 은퇴 후 생활설계
4. 못 믿을 국가, 노후 자금은 내가 직접
5. 나의 사전에 정년은 없다
6. 우리 부부는 이렇게 노후를 준비한다
7. 생명보험 100% 활용하기
8. 저축에서 투자로 패러다임 시프트
9. 주식투자의 빛과 그림자
10. 나는 투자신탁으로 간다
11. 목돈없이도 하는 부동산 투자
12. 금융교육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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