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개의 힌트를 듣기도 전에 답이 나올 만큼 너무 친숙한 곳, 바로 남산이다.
시인 이성복의 ‘비 오는 날 우산 받쳐 들고 산에 오르면/산은 흘러내리는 빗물 제 혀로 핥고 있다’는 읊조림처럼 촉촉하게 비를 머금은 남산을 22일 사진작가 조세현씨(45)와 함께 올랐다.
화려한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찍는 조씨에게 평범한 남산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흰색 운동화를 갖춰 신고 털털하게 웃는 조씨의 남산 예찬은 예사롭지 않다.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출발해 남산도서관까지 뛰어오르면 땀에 젖은 가슴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서울 시내가 품안에 들어온다는 것.
“일주일에 적어도 2, 3번은 아침마다 이곳을 뜁니다. 옥수동에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 맛에 이사도 못 간다니까요.”
조씨에겐 올해가 삶에 커다란 전환을 맞은 지 10년이 되는 해다. 1993년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스튜디오를 열었고 하루 3갑을 피우던 담배를 끊었으며, 바로 ‘남산 달리기’의 참맛에 빠져들었다.
“셋 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굽이진 산마루를 내 힘으로 뛰어오르면서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는 합니다.”
남산을 오르는 또 다른 즐거움 하나. 자동차로 지나치기에 바쁜 이들은 느낄 수 없는 풋풋한 자연 속에서 서울에서 보기 드문 야생동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때마침 곁으로 다가왔다 푸드덕 날아가는 꿩을 바라보는 조씨의 눈가에는 따뜻함이 묻어난다.
조씨는 사진을 찍을 때 모델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으로 유명하다. 촬영시간 3시간 중 2시간 이상을 눈을 맞춰 가며 얘기를 나누다 보내면 모델들이 오히려 ‘사진은 언제 찍느냐’고 걱정한다는 것.
“모든 일은 ‘신뢰’에서 출발합니다. 서로간에 믿음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좋은 사진은 나올 수가 없죠. 남산도 저와는 그런 신뢰로 맺어진 곳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까요?”
정양환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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