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7월 31일 18시 16분


어떤 종말(2)

며칠 뒤 조고는 다시 이사(李斯)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렸다.

“낭중령께서 말씀하시기를 폐하께서는 지금 조용히 쉬고 계시다고 합니다. 승상께서 찾아 뵙고 정사를 아뢰기 좋은 때이니 바로 입궐하시지요.”

이에 이사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궁궐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세 황제 호해는 그날도 궁녀들과 환관들을 모아놓고 천박하고도 음란한 놀이에 빠져 있었다. 조고가 천연덕스런 얼굴로 들어와 승상 이사가 정사를 아뢴다며 찾아왔다고 말하자 벌컥 화를 냈다.

“승상은 하필 이런 때만 골라 나를 찾아오는가? 짐은 아끼는 이들과 놀이를 즐기며 잠시 머리를 식히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다음날 들라는 말과 함께 이사를 돌려보내게 했다. 그러나 조고는 이사에게 돌아가 또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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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한가로워 보이시기에 승상을 모셔오게 했는데 오늘도 틀린 것 같습니다. 내쳐 쉬시고 싶다 하니 찾아뵙고 정사를 아뢰는 일은 뒷날로 미루어야겠습니다.”

다음날 들라는 말을 쏙 뺀 체였다. 그제야 이사도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워낙 엄중하게 둘러싸여 있는 금중(禁中)의 일이라 조고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조고가 세 번째로 이사를 부른 날은 이세황제가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벌여놓고 벌거벗은 후궁들 사이를 나비처럼 넘나들며 술과 미색에 함께 취해 가는 중이었다. 조고가 들어와 이사가 또 찾아왔다고 하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또 이사냐? 좋다. 들라고 하여라!”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사가 오로지 제 할 말만 머리 속으로 가다듬으며 들어서자 대뜸 꾸짖기부터 했다.

“짐에게는 한가한 날이 많았지만 그때는 승상께서 오지 않았소. 그러다가 짐이 좀 쉬며 즐기려하거나 아끼는 이들과 다정히 술잔이라도 나누려고 들면 어김없이 찾아와 정사를 아뢰겠다고 하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짐이 어리다고 승상께서 감히 얕잡아보시는 것이오? 아니면 승상의 자리가 높고 귀해 이 황제를 업신여겨도 된다고 믿으시오? 짐을 어떻게 보고 이리 함부로 구시오?”

그 말에 비로소 이사도 정신이 홱 돌아왔다. 조고가 가운데서 농간을 부린 걸 눈치챘으나 워낙 이세 황제가 화를 내고 있어 그 자리에서는 자신을 변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릴없이 머리를 조아려 잘못만을 빌다가 쫓겨나듯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조고의 간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사의 뒷모습이 금중에서 사라지기 바쁘게 이세 황제 곁으로 가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폐하. 어쩌시려고 승상을 그리 대하십니까? 실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이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세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저 사구(沙丘=시황제가 죽은 땅)의 모의에는 승상도 관여하였으나, 폐하께서는 지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는데도 승상의 벼슬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으니 사람의 마음으로 어찌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모르긴 하되 그분이 속으로 바라는 바는 폐하와 땅을 나누어 왕 노릇이라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상을 달래기는커녕 꾸짖어 쫓다시피 하셨으니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실로 걱정입니다.”

조고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부르르 떨기까지 하며 덧붙였다.

“게다가 폐하께서 묻지 않으시어 감히 여쭈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승상의 맏아들 이유 (李由)는 삼천(三川)군수로 나가있고, 초(楚)땅의 도적인 진승 오광 등은 모두 승상의 이웃 고을에 살던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초 땅의 도적들이 그곳을 휩쓸고 다니며 삼천군을 지나가도 그곳 군수는 도적들을 치지 않았습니다. 저도 진작부터 삼천군수와 도적들 사이에 사람과 글이 몰래 오간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그게 참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폐하께 아뢰지 못했습니다. 뿐만이겠습니까? 승상도 궁궐 밖에서는 권세가 폐하에 못지 않습니다. 그런 승상 부자(父子)가 도적과 손을 잡고 폐하께 맞서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위태로움은 실로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조고의 말을 듣자 이세 황제도 으스스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사를 잡아들이게 하고 싶었으나 그 죄상이 확실하지 않아 그리하지 못했다. 가만히 사람을 풀어 삼천군수 이유와 초나라 땅의 반도(叛徒)들이 내통하는 증거부터 잡아오게 했다.

조고와 이세 황제가 주고받은 말이며 이세황제가 삼천군에 사람을 푼 일은 곧 이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사는 더욱 이를 갈며 조고의 간교함을 밝히기 위해 이세황제를 만날 틈을 노렸다. 그러나 이세 황제는 감천궁(甘泉宮)에 머물면서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곡저((각,곡)抵=角抵 라고도 하는데 씨름과 춤을 결합한 것 같은 놀이)와 광대들의 연희(演戱)에 빠져 세상을 잊고 지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궁궐 깊숙이 들어앉은 황제를 만날 길이 없자, 이사는 마침내 글로 조고의 죄를 아뢰게 되었다.

<신이 듣기에, 신하가 그 군주와 다투어 틀어지면 위태로워지지 않는 나라가 없고, 지어미가 지아비와 다투어 틀어지면 위태롭지 않은 집안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대신 중에는 폐하만큼이나 남에게 세력과 이득을 내려줄 수도 있고, 또 그 만큼 남을 억누르고 빼앗을 수도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 권세가 폐하와 크게 차가 없으니 이는 실로 크게 부당한 일입니다.

옛적 사성(사성)이었던 자한 (자한)이 송나라의 재상이 되자 몸소 형벌을 집행하며 위세 있게 행동하더니 일년도 안돼 제 임금을 겁주고 억눌렀습니다. 전상(전상)도 제(제)나라 간공(간공)의 신하가 되어, 높고 귀하기가 그를 따를 자가 없고 재물도 공실(공실)과 비슷해지자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덕을 펼쳐, 아래로는 민심을 얻고 위로는 벼슬아치들의 마음을 사들이더니, 슬그머니 제나라를 차지하러 들었습니다. 뒷날 궁중 뜰에서 재여(재여)를 죽이고 이어 궁 안에서는 간공을 시해하여 끝내는 제나라를 빼앗고 말았습니다.

지금 조고는 그 품은 뜻이 사악하고 그 행동이 위태롭기가 마치 송나라의 재상 자한과 같으며, 그 권세나 사사로이 모은 재산도 제나라의 전상에 못지 않습니다. 전상과 자한이 그 임금에게 반역하던 수법을 아울러 본받아 조고가 폐하의 위엄과 권세를 허물려함은 한이(한비)가 한나라왕 안(안)의 재상으로 있을 때와 다름없습니다. 폐하께서 이제라도 조고를 다룰 방책을 찾지 않으시면 머지않아 그가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같은 이사의 상소가 올라가자 이세 황제도 더는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황제는 마지못해 이사를 금중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마음은 온통 조고 편이었다. 자신이 나서 조고를 변호하기에 바빴다

“좌(左)승상의 글은 잘 읽었오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조고는 본디 환관으로 나라가 평안하다고 해서 제멋대로 하지 않았고, 위태롭다고 해서 그 마음을 바꾼 적도 없소. 행실을 맑게 하고 끊임없이 선행을 닦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충성으로 그 벼슬이 높아지고 신의로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 짐이 그를 참으로 어질다 여기는데 승상이 의심하니 무슨 까닭이오?

게다가 짐은 많지 않은 나이에 선제(先帝)를 잃어 배운 것만으로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고, 승상은 늙어 언제 이 세상일을 버려두고 떠나갈지 모르니, 짐이 조고에게 국사를 맡기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오? 더군다나 조고는 사람됨이 깨끗하고 부지런하며, 아래로는 민심을 알고 위로는 짐의 뜻에 맞으니 그만한 인재도 없을 것이오. 승상은 그 사람을 너무 의심하지 마시오.”

그 말을 들자 이사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가 높아져서 맞받아치듯 말했다.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속고 계십니다. 조고는 본디 미천한 출신이라 도리에 밝지 못한데다 그 탐욕은 끝간 데를 모릅니다. 그런데도 권세는 폐하에 버금가니 반드시 몹쓸 일을 저지를 자라 폐하께 그 위험함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부디 밝게 살피시어 돌과 옥(玉)을 분별하시옵소서.”

하지만 이세 황제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거듭 조고를 감싸며 오히려 이사를 꾸짖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사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물러간 뒤에는 조고를 불러 이사가 한 말을 귀뜸 해주고 걱정까지 곁들였다.

“낭중령은 부디 조심하시오. 승상이 낭중령을 해칠까 두렵소”

그러자 조고는 간사한 눈물을 쏟으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승상이 걱정거리는 오직 이 조고 뿐이며, 이 몸이 죽으면 승상이야말로 전상(田常)과 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 것입니다. 아아, 그때는 누가 있어 폐하를 지켜드리리까!”

한편 조고의 간악함을 알리려 했다가 도리어 이세황제에게 꾸중만 듣고 쫓겨난 꼴이 된 이사는 울적하면서도 불안했다. 어떻게든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다시 한번 가까이 할 틈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右)승상 풍거질(馮去疾)과 대장군 풍겁(馮劫)이 부른 듯이 이사의 집을 찾아왔다

“좌승상, 아무래도 이대로는 아니 되겠습니다. 소부(少府) 장함(章邯)이 죄수들을 이끌고 가서 우선 급한 불은 껐으나, 관동(關東)은 아직도 도적 떼로 들끓고 천하는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아방궁을 짓는 데나 인력과 물자를 퍼붓고 있으니, 나라의 대신이 되어 어찌 그냥 보고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함께 가서 폐하를 찾아 뵙고 간곡히 아뢰는 게 도리일 듯합니다.”

두 사람의 그같은 말에 이사는 갑자기 눈앞이 훤해지는 듯했다. 기다리던 때가 절로 찾아온 느낌이었다. 그들과 힘을 합쳐 황제를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려 수만 있다면 조고를 잡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이사는 그 자리에서 의관을 갖추고 풍거질, 풍겁과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좌(左)우(右) 승상과 대장군이 함께 알현을 청하자 황제도 마지못해 그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황제 앞에 나아간 그들 세 사람은 목청을 가다듬어 간곡히 아뢰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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