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5>LG, 지주회사 체제전환 성공

  • 입력 2003년 8월 3일 17시 15분


2003년 3월 1일은 한국의 기업사(史)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재계 2위인 LG그룹이 국내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완전히 탈바꿈한 날이기 때문이다. ㈜LG가 바로 그 지주회사다. 49개의 LG 계열사 중에서 LG전자와 LG화학 LG칼텍스정유 등 34개사가 그 밑에 편입됐다.

지주회사 출범은 충분히 축하할 사건이었다. 재벌식 소유지배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중요한 변화의 하나가 지주회사로의 개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기업계열이 ‘재벌’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은 것은 불투명한 소유지배구조 탓이었다. 재벌식 소유구조의 특징은 총수가 5% 안팎의 얼마 안 되는 지분을 가지고 많은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려고 계열사간 순환출자, 상호출자 등이 동원됐다. 복잡 난해한 출자로 ‘가공(架空)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

물론 지주회사가 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가공자본이 사라지면서 ‘지분만큼 지배하고, 권한만큼 책임지는’ 체제로 가는 중요한 걸음을 내딛는 것만은 틀림없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LG의 지주회사 전환=“재벌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순환출자 구조’의 고리를 끊고 기업의 투명성과 경영효율성을 극대화해 기업가치를 높이는데 지주회사 설립의 의의가 있다.”

진보적 시민단체가 했을 법한 이 얘기는 실은 지난달 말 LG그룹의 홈페이지(www.lg.co.kr)에 실린 ‘만화로 보는 LG의 지주회사’에 실린 한 토막이다.

LG 직원이 그린 이 만화에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지주회사로 전환한 LG그룹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LG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

재벌이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대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정부도 ‘경제력 집중의 우려’를 이유로 수십년간 금지했던 지주회사 설립이 가능하도록 99년 공정거래법을 고쳤다.

‘정도(正道)경영’을 외쳐오던 LG그룹은 이 과정에서 지주회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LG그룹이 지주회사 체제전환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 조건은 외환위기 이후 낮아진 주가였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상장 및 등록 자회사의 30%, 비공개 자회사의 50%를 지주회사가 보유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주식매입비용이 필요하다. 주가가 떨어지면 돈(전환비용)이 덜 들어가는 것.

LG그룹 구조조정본부의 마지막 본부장이었던 강유식(姜庾植) ㈜LG 부회장은 “2000년 초 주가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면서 “그러나 구본무(具本茂) 회장 등 대주주의 강력한 추진의지가 없었다면 지주회사 체제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주주의 사정=LG의 지주회사 전환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등장한다.

LG그룹은 ‘구-허 양대 창업가문’이 주식을 고루 나눠 갖고 있어 지분구조가 매우 복잡했다. 분명한 주인도 없었다. 이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약점이었다. 그러나 지주회사 체제전환이 결정되자 오히려 대주주들이 뜻을 모아 지분을 모으거나 현물로 출자함으로써 핵심기업에 대한 지분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또 있다. 양 가문이 주식을 양분함으로써 견제와 균형이 저절로 이뤄졌고 그동안 어느 한 쪽이 함부로 지분을 낮출 수 없었다. 엄청난 회계분식이나 부실을 숨기기도 힘들었다. 지분이 높다는 것은 지주회사 전환시 주식매입비용이 덜 든다는 뜻. 분식이 없다는 것도 체제전환을 가능케 한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100명이 넘는 대주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이 때문에 LG건설 등 몇몇 기업은 지주회사 체제에서 분리되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지주회사의 효과=출범한 지 만 5개월된 LG 지주회사 체제의 성적표는 주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합 지주회사인 ㈜LG의 주가는 LGCI와 LGEI가 합병돼 재상장된 3월 11일 6550원(종가기준)에서 8월 1일 현재 8320원으로 27% 올랐다. 이와 함께 18개 LG그룹 계열사의 공개기업 시가총액은 연초 20조4000억원에서 8월 1일 현재 24조6000억원으로 26% 상승했다. 같은 기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16%다.

㈜LG의 조석제(趙碩濟) 재경부문 담당 부사장은 “전체적인 주가 동향을 고려할 때 LG 자회사 주가 상승의 대부분은 기업지배구조 개선 효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주회사의 유일한 수입원이 배당금이므로 ㈜LG가 지속적인 투자를 위해서라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배당비율과 배당방식이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감도 주가상승의 이유다.

파이낸셜 타임스 등 여러 외신들도 LG그룹의 변화를 ‘한국 기업 구조조정의 모범 사례’라고 평가하며 관심을 보였다. 지난달 3일에는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재무부와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소속의 고위 경제관료 12명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를 방문해 베트남 국유기업의 개혁과 지배구조 개선의 모델로 참고하겠다며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했다.

LG그룹 홍보팀장인 정상국(鄭相國) 부사장은 “최근 그룹 임직원 16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73%가 지주회사 체제전환이 LG기업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효과는 주가 등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큰 LG그룹의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3단계로 진행된 전환과정 ▼

LG그룹의 지주회사 전환계획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2001년.

2001년 4월 LG그룹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LG화학이 먼저 ‘출자부문’ ‘화학부문’ ‘생활건강부문’의 3개 별도법인으로 분할됐고 출자부문을 맡는 화학부문의 지주회사 LGCI가 설립됐다. 이후 LGCI는 LG화학과 LG생활건강 등 계열사 주식을 공개매수하는 방법으로 지주회사 체제를 갖췄다.

LG그룹의 다른 한 축인 전자부문에서는 이듬해 4월 LG텔레콤 데이콤 LG산전 등의 출자지분 관리를 맡는 지주회사 LGEI와 전자 및 정보통신 사업을 맡는 사업 자회사인 LG전자로 분리됐고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LGEI는 LG전자 전체주식의 20.4%를 공개매수했다.

마지막으로 올해 3월 1일 LGCI와 LGEI가 합병되면서 자본금 13조원, 자산 6조2000억원, 자기자본 4조6000억원, 부채비율 35%의 통합지주회사 ㈜LG가 출범했고 3월 말에는 그룹 전체의 조정역할을 맡던 구조조정본부가 폐지됐다.

이 과정에서 LG그룹은 지주회사 체제전환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LCD사업에 필립스의 외자를 끌어들여 LG필립스LCD를 출범시키는 등 해외자본 유치에 주력했고 LG산전의 엘리베이터사업, 광고대행업체인 LG애드 등 비핵심사업을 팔아 몸집을 줄였다.

▼"계열사 떼어내고 팔고…아픔없인 성공도 없다" ▼

지주회사 ㈜LG의 강유식(姜庾植) 부회장은 3월 말 해체된 LG그룹 구조조정본부의 마지막 본부장이다.

그는 1999년부터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아 LG그룹의 지주회사 체제전환을 준비하고 실무작업을 이끌어 왔다.

다음은 그에게 들어본 지주회사 이야기.

―지주회사 체제전환 이후 그룹이나 계열사 경영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다른 계열사에 대한 출자의 부담이 없어진 만큼 자회사의 경영성과도 이전보다 냉정하고 투명하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자회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은 회사의 성과를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경영을 하게 되고 자회사간에 선의의 경쟁 분위기가 구축됐다.”

―기업지배구조의 변화가 기업의 실적이나 주가에 미치는 영향은….

“기업지배구조가 경영실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효과는 매우 장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단기적인 효과도 있다. 실적이 좋은 기업이라도 지배구조가 건전하지 못할 경우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LG 지주회사가 출범한 이후 자회사의 주가가 많이 오른 데서 시장의 긍정적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체제 전환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지주회사 체제전환을 위해서는 대주주의 강력한 의지, 재무건전성과 충분한 자금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한 자회사 지분보유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식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장의 오해를 샀다. 증권거래법이나 세법의 세부규정도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해서는 미비한 구석이 많다.”

―지주회사 체제전환을 원하는 다른 대기업에 하고 싶은 조언은….

“LG는 전환과정에서 비핵심사업이나 계열사를 많이 팔았고, 얽힌 것을 풀어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고 상실감도 느꼈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비핵심 사업을 과감히 매각할 수밖에 없다. 모두 안고 갈 수는 없으며 뼈를 깎는 구조조정만이 유일한 길이다.”

―지주회사 체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자회사끼리 경쟁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다 보면 중복투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지주회사가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 측면에서 조정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자회사가 대규모 증자결의를 할 경우 지주회사와 자회사간에 의견이 상충될 수 있다. 이 때는 지주회사가 자회사에 파견된 이사를 통해 지주회사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설득해야 한다.”

―LG가 지배구조 차원에서 더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5년간 사외이사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으며 전원이 사외이사로 구성된 자회사의 감사위원회 활동을 활성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사회를 독립적이고 활성화된 조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소수 주주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배당방식은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

“지주회사는 자회사들이 재무건전성을 유지하고 필요한 자금을 활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의 배당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자회사의 장기적 경쟁력을 해칠 정도의 과도한 배당은 결국 지주회사의 기업가치 하락을 초래할 것이다. 주주이익과 기업성장성을 고려해 적정한 수준을 결정해 가야 한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