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佛 여성의 상징 ‘마리안’도 바뀌나

  • 입력 2003년 8월 5일 19시 06분


프랑스 정부 공문서에는 한 젊은 여성의 초상이 실루엣으로 새겨져 있다. 이 여성이 바로 마리안(Marianne)이다. 마리안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와 함께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상징이 된 가상의 여성상이다.

프랑스인들이 보통 ‘마리안’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프랑스 혁명기인 1830년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한 손에는 장총을, 다른 손에는 삼색기를 든 채 혁명의 선봉에 선 모습이다. 몇 년에 한 번씩 ‘마리안’ 모델을 뽑는 행사에서는 카트린 드뇌브나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미모의 여배우들이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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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사와 별도로 최근 파리의 하원 청사 앞에는 ‘오늘의 마리안들(Mariannes d’Aujourd’hui)’이라는 제목과 함께 여성 13명의 모습을 담은 대형사진이 걸렸다. 그걸 본 파리시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형적인 마리안의 이미지, 즉 아름다운 백인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

13명 대부분이 북아프리카 출신 이슬람교도이거나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또는 그 자녀였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사미라 벨일(30)은 14세 때 윤간(輪姦)을 당했던 경험을 책으로 펴내 화제가 된 이슬람 여성.

장 루이 드브레 하원의장은 제막식 연설에서 “오늘날의 마리안들은 폭력과 신체적 위협,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국가와 국회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민자 여성을 마리안으로 내세운 것은 참신한 발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프랑스 사회 분위기가 바뀐 증거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유권자의 20%가 강력한 이민 반대를 천명한 극우파 장 마리 르펜을 지지했을 정도로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슬람 여학생이 교리에 따라 머리에 쓰는 스카프를 금지하려는 법안도 추진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프랑스 국민 3명 중 1명이 거리에서조차 머리 스카프 착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응답하는 등 이슬람 여성에 대한 시각도 곱지 않다. ‘오늘의 마리안들’은 과거의 마리안과는 달리 프랑스의 영광이 아닌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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