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신일철/‘鄭회장 조문’ 北결례 지적해야

  • 입력 2003년 8월 11일 18시 34분


고(故) 정몽헌 회장의 비보에 누구나 착잡함을 느꼈을 것이다. 불경에 달을 가리켰을 때 그 손가락만 보는 단견을 깨우친 명구가 떠오른다. 문제의 근본이 북녘에 있다고 지북(指北)을 해도 다시 소위 ‘남남갈등’이 재연되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북한은 남북경협의 주역인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타계 소식에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명의로 ‘고인의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조문을 보냈다. 그런데 그 조문에 ‘고인의 사망 소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에서는 사망 신고서 등 공식문서에는 ‘사망’이란 표현을 쓰지만 조의를 표하는 글이나 문상에서는 ‘사망’이란 말은 감히 쓰지 못한다. 장례에 관한 표현은 지극히 조심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서거’ ‘별세’ ‘타계’ ‘작고’ 등을 택한다. 이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장례조문의 예법에 속한다.

2001년 3월 23일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례 때도 북한 김정일 총비서가 ‘조전’을 보내고 서울에 조문단이 왔다. 그 조문 역시 ‘사망’이라는 표현을 썼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총련 함덕수 의장 별세에 대해서는 ‘서거’라 했다. 당간부급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남한용 조문에만 ‘사망’이란 표현을 사용하는가.

한국 정부는 이런 민족적 결례에 대해 북한측에 따끔하게 충고하고 시정을 종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국 언론 방송에서도 ‘사망’ 조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북감각에 불감증이 생긴 사례는 또 있다. 8월 4일 있은 북한 최고인민회의(국회) 대의원 선거와 관련해 일본 신문들은 “투표율 99.9%, 전 후보 100% 찬성투표”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부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 언론은 이를 뉴스로 보지 않고 구문(舊聞)에 속하기 때문에 기사조차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북한의 선거결과는 자세히 살펴보면 ‘뉴스’다. 지난 50여년간 북한의 선거가 99.9% 투표, 100% 찬성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이 바로 뉴스인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외교, 군사, 대남관계에서도 북한이 달라질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기권도 약간 있고 복수후보도 있었다는 발표가 나왔다면 뭔가 햇볕정책의 효과가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제로효과’였다는 점이 다름 아닌 뉴스 아닌가.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해온 진보파의 안목으로도 이런 100% 찬성 투표결과를 보고 북한정치가 선거랄 것도 없는 선거로 유지되고 있음을 가늠해내야 한다. 우리 사회 내 친북과 반북의 ‘남남갈등’이 있다 해도 이런 선거결과를 보는 눈에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보주의의 시각일수록 독재를 비판하는 시각은 더욱 날카로워야 한다. 친척이나 친구가 조전이나 조문에 ‘사망’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당하는 측의 느낌이 어떨까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외국인이 한국어학당에서 처음 한국어를 배운 경우라면 ‘사망’ 조문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 고위층이 우리 민족이라는 데서 거부감은 커진다. 또 이런 결례나 망령된 언사 하나 고쳐주지 못한 우리 관계당국의 대북자세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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