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32>3부⑥정주영의 대북사업 집념과 좌절

  • 입력 2003년 8월 13일 18시 05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은 “내 전 재산을 북한에 줘도 아깝지 않다”며 대북사업에 강한 집념을 보였으나 현대의 자금난 등 악재가 겹쳐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 세상을 떠났다. 98년 10월 소떼를 몰고 2차 방북길에 나선 정 명예회장. -동아일보 자료사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은 “내 전 재산을 북한에 줘도 아깝지 않다”며 대북사업에 강한 집념을 보였으나 현대의 자금난 등 악재가 겹쳐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 세상을 떠났다. 98년 10월 소떼를 몰고 2차 방북길에 나선 정 명예회장. -동아일보 자료사진
“북한 가는 거 한번 알아봐.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인 1997년 12월 말 어느 날 저녁.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으로 정몽헌(鄭夢憲·MH) 당시 현대건설 회장을 호출해 대북사업 추진 특명을 내렸다.

“정권도 바뀌고 했으니 뭔가 달라지지 않겠어. 내 평생 소원은 북한이 열리는 걸 보는 거야.” ‘왕회장’의 주름진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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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판 돈을 훔쳐 북한의 고향(강원도 통천)을 떠나 한국 최고의 그룹을 일궈낸 정주영은 누구보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이에 앞서 정주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자격으로 89년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에 끼어 통천의 옛 동네를 찾아 친지들과 회포를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남북관계가 정체되면서 정주영의 향수는 깊어만 갔다. 여기에다 정주영은 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괘씸죄’로 김영삼(金泳三) 정권 때는 운신이 지극히 제한된 상태였다. 그러던 정주영에게 DJ의 당선은 대북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더할 수 없는 호기였다.

지시를 받은 정몽헌은 방북 경험이 있는 김윤규(金潤圭)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현 현대아산 사장)을 급히 불렀다. ‘자식보다 명예회장 속을 더 잘 안다’는 가신(家臣) 중의 가신 김윤규는 즉각 현대그룹의 해외 라인을 총동원해 북한과 접촉할 창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몽구(鄭夢九·MK) 당시 현대정공 회장과 정몽헌 사이에 한때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MK 역시 아버지의 숙원인 대북사업을 성공시켜 신임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의 대북접촉 채널로 활동했던 일본 규슈대학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二) 교수의 증언.

“정주영은 북한과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정몽구는 국내, 정몽헌은 해외를 맡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북한이 해외냐 국내냐를 놓고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전부터 북한과 접촉하고 있던 정몽구가 북한에 ‘정몽헌은 현대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팩스를 보내는 바람에 98년 초 싱가포르에서 갖기로 했던 북측과의 회합이 취소된 일도 있었다. 결국 정주영이 나서 정몽헌이 대북교섭을 맡아서 하도록 정리를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MH는 2월 초 이익치(李益治) 당시 현대증권 사장과 함께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날아가 전금철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은밀히 만났다.

북한측도 새 정권 출범에 따른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회담에서 북측은 정주영의 방북 희망에 대해 “같은 민족끼리 보자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라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김윤규가 4월 18일 북한을 방문해 정주영의 방북 일정에 합의할 때까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정주영은 단순한 ‘방문’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주영은 간신히 방북 일정을 잡고 돌아온 김윤규에게 “판문점을 열어 달라고 해. 천하의 정주영이가 고향에 가는데 왜 중국을 거쳐 가느냔 말이야”라며 고집을 피웠다.

정주영의 주문은 당시 남북관계로 볼 때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왕회장’의 명령인 만큼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MH와 김윤규는 백방으로 뛰기 시작해 결국 두 달 만에 불가능을 현실로 바꿔냈다.

98년 6월 16일 판문점에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서는 정주영의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 가득했다.

왜 소였을까. 정주영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의 한 대목에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시고 화전을 일구시는 한편으로 소도 열심히 키우셨다.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어린 나이부터 소 꼴 베는 일에 총동원되고는 했다. 그렇게 열심히 키운 소를 팔아서 아버님 형제분들을 장가보내 살림 내는 데 쓰거나 그런 큰일이 없는 해에는 그 돈으로 논밭을 사곤 하셨다. (중략)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다.”

정주영이 한국 최고의 부자로 일어서게 된 ‘종자돈’도 바로 소 판 돈 70원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DJ정부 핵심 관계자의 증언. “현대의 추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DJ정부 초기에만 해도 현대는 북한과 별다른 인맥이 없었다. 당시는 오히려 통일교 재단이 훨씬 탄탄한 대북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통일교측으로부터는 도움을 받았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상황이었다. 이익치가 당시 이종찬(李鍾贊) 안기부장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하곤 했다. 그러나 현대는 불과 몇 달 만에 상황을 역전시켰다.”

소 떼 방북으로 고향 가는 길을 트기는 했지만 이후의 상황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아들들의 갈등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방북 성과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MH였다. 장남인 MK도 함께 북한을 방문했지만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대북 경제협력사업,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면담계획 등 민감한 프로젝트는 모두 MH의 몫이었다.

대북사업을 계기로 MH는 현대그룹의 경영 전면에 나서며 후계자로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룹 안에서는 MH가 MK를 제치고 새로운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는 말이 나돌았고 가신들도 양대 진영으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정치적 상황도 문제였다. 소 떼 방북 직후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6월 22일)과 묵호 무장간첩 침투사건(7월)이 터졌고, 남한 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난여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같은 해 10월 27일 김정일의 초청을 받아 소 떼를 몰고 2차 방북길에 올랐다. 정주영 일행은 30일 밤 김일성(金日成) 전 수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 바로 옆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김정일은 배석했던 김용순(金容淳) 아태평화위원장에게 “사업 진행에 문제가 없느냐”고 묻고 “현대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주라”고 지시하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현대에 30년간 금강산 독점 개발권을 보장했다.

금강산 사업은 순항궤도에 올랐고 11월 18일 강원 동해항에서 현대 금강호가 북한을 향해 출범했다. 이어서 현대는 결국 99년 3월 대북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DJ 정부도 적극적으로 정주영을 지원한 것은 물론이다.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통일수석비서관이었던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의 증언. “정주영은 고향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게 있었다. 금강산을 세계적 관광 명승지로 만들어 보답하겠다는 것이다. 사석에서 ‘내가 번 돈 북한에 다 줘도 아깝지 않다’고 하더라. 다른 회사는 대북 경협에 대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간다’는 입장이었으나, 정주영은 ‘누가 뭐래도 한다’며 밀어붙였다. 대북정책은 DJ와 정주영이 1등 공신이다.”

그러나 결국 정주영의 꿈은 북한의 변덕과 현대의 내분, 유동성 위기 등이 겹치면서 좌절되기 시작했다.

99년 6월 서해교전이 터지면서 DJ의 햇볕정책에 의구심이 제기되고 대북사업도 꼬이기 시작했다. 2000년 3월에는 MK와 MH가 후계권을 놓고 벌인 ‘왕자의 난’이 터졌다.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였던 정주영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01년 3월 21일, 재계 거인이자 북한의 문을 열어젖히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던 정주영은 서울아산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여 뒤 MH도 아버지를 따랐다.

▼“애초부터 무리”▼

“대북 사업을 현대가 맡은 것부터 말이 안 됩니다. 정부가 할 일을 민간기업이 주도하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요. 대북 사업 한다고 멀쩡한 회사 다 망가졌습니다.”

고(故) 정몽헌(鄭夢憲·MH)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현대그룹의 구조조정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던 채권단의 한 고위임원은 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고 이같이 말했다.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대북 사업의 꿈을 아들 MH가 대신 이루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의 자살과 함께 현대는 존망이 걸린 위기로 치닫게 됐다.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 터졌을 때 정 명예회장이 정 회장에게 현대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 현대상선 현대아산 등을 맡긴 것도 대북 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전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 임원)

정 명예회장의 꿈은 애초부터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MH는 현대의 주력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날로 늘어나는 막대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를 채권단의 손에 넘겨야 했다. 대북 사업의 가장 큰 축을 담당했던 현대상선 역시 대북 송금을 위해 산업은행에서 빌린 4000억원을 갚느라 알짜 사업체인 자동차운반선을 떼어 내 팔았다.

채권단은 현대상선을 살려주는 대가로 대북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을 주문했고 현대상선은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대북 사업 주체인 현대아산은 자본금 4500억원을 대부분 써버린 채 아직도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그룹이 북한에 4억5000만달러를 비밀 송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나라당의 반대로 남북협력기금의 예산지원도 대폭 삭감됐다.

MH의 자살 이후 현대아산 김윤규(金潤圭) 사장이 “현대와 내가 뒤를 잇겠다”며 대북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자금줄이 모두 끊긴 상황에서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대북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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