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 초 어느 날의 일이다. 국회 본회의에서 상임위원장 선출이 이뤄지고 있던 시간, 김 의원은 지역구(강원 태백-정선)에서 열린 한 단체의 대표 이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굽이진 산길을 돌아 4시간 만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국회의원으로서의 기본 임무를 외면하고 이래서야…’하는 죄책감도 없지 않았죠. 하지만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 ‘국회의원 조금 하더니 건방져졌다’고 수군거리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낼 ‘표’들을 생각하니 금방 아찔한 생각이 들더군요.”
당 기조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김 의원은 지역구에 대소사가 있으면 주요 회의가 있어도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간 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지역구에 도착하면 축사를 누가 먼저 하느냐는 것에부터 신경이 바짝 쓰인다. 평소 ‘성의’가 부족하게 보여 찍히면 주최측에서 시장 군수 또는 관내 유력 단체의 장을 앞 순위에 배치해 ‘물먹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방분권화가 진행될수록 군민의 날, 면민의 날, 체육대회, 중고교 동문회, 각종 단체의 정기총회 등 행사는 엄청나게 늘고 수많은 행사에서 모두 참석을 요구하거든요. 못 간다고 발을 빼면 ‘(다음 선거에 나올) 누구는 온다던데’라며 은근히 겁을 주기도 합니다.”
축사가 끝나면 주는 술 받아먹는 것도 그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다. “면 단위 행사의 경우 천막을 이(里) 단위로 쳐놓습니다. 일일이 돌면서 인사하고 술 한 잔씩 받아먹는데 다 돌려면 서너시간은 족히 걸려요.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신 술 때문에 하늘이 빙빙 돌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러다 보니 차분히 입법 정책을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자탄이다.
“온종일 영업사원처럼 돌아다니다 보면 내가 국회의원인지 ‘술상무’인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 국회의원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새벽에 산으로 들로 떠나는 친목회원들을 환송하러 우유라도 한 박스 사들고 관광버스에 올라야 할 때도 많다. 지리산으로 떠나는 관광버스 꽁무니에 대고 손을 흔들어 주다 보면 ‘이런 일 하려고 국회의원 됐느냐’는 자괴감이 들 때도 없지 않다.
게다가 선거법에는 각종 관혼상제에 1만5000원 이상의 금품을 제공할 수 없도록 돼있지만 5만원 10만원 정도의 부조금을 내지 않으면 욕하는 사람들도 많다. 별수 없이 알면서도 법을 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동안은 결혼식장에 가서 돈을 내지 않고 나왔다.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그래 갖고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겠느냐” “외국서 공부하고 왔다고 그러느냐”는 수군거림뿐이었다.
각종 민원 청탁과 관련해 김 의원은 “자기들이 해보다가 불가능한 것을 갖고 와요. 국회의원은 해결할 수 있을 것 아니냐고 우기지만 자격이나 능력이 안되는 자식이나 친척을 취직시켜 달라거나 수사 받는 것을 빼달라는 부탁을 할 때는 정말 당황스러워요.”
사실상 ‘브로커’ 노릇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예산만 해도 국가 차원의 경제성 합리성보다는 ‘무조건 끌어오라’는 식의 무리한 주문에 어깨가 무겁다.
김 의원은 “국회의원이 ‘지역구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입법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할 수 있으려면 주민들의 의식도 함께 바뀔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온종일 술을 받아먹다가 대낮부터 만취상태의 지친 몸을 끌고 이 상가, 저 결혼식장을 전전하다 보면 누구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조차 감감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입법기관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경조사와 지역구 행사에 와 술시중 잘 드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공부하고 노력해 좋은 의정활동을 펴는 국회의원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풍토가 먼저 조성돼야 정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게 김 의원이 내린 결론이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김택기 의원은…▼
김진만(金振晩) 전 국회부의장의 차남으로 기업인 출신 초선의원. 미국에서 10년간 유학했으며 미주리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87년 귀국 이후 동부애트나생명보험 동부고속 사장 등을 거쳐 93년부터 누적적자 1868억원에 달하던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 사장을 맡아 4년 만에 흑자로 반전시켰다. 동부화재 사장 재임시에는 고려대 강원대 등에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민주당 선대위 정세분석위원장을 맡아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 민주당 기조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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