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총선 때 여당(민자당)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친구가 얼마 전 ‘다 지난 일’이라며 털어놓은 얘기다. 다 지난 일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선거판 ▼
2000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서울 양천갑)로 출마했던 박범진 전 의원은 본보(8월 20일자 A4면)에 밝힌 ‘참회록’에서 “(선거에 쏟아 부은 돈이) 기억나는 것만 9억여원대”라고 말했다. 8년 전이나 후나 액수까지 같지 않은가. 선거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지. 박 전 의원은 96년 총선(당시는 신한국당 후보) 때도 당 사무총장에게서 3억원, 대우그룹 관계자에게서 2억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대우그룹 관계자야 중앙당이 준 명단에 따라 돈을 싸 들고 온 것이겠으니 무슨 죄가 있겠나. 끝내 부실로 쓰러진 대우만 억울한 노릇이지.
보름 전 검찰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긴급체포해 구속했다. 현대비자금 ‘150억원+α’에서 α에 해당되는 100억원 이상을 받은 혐의인데 그가 현대에서 돈을 받은 시점이 2000년 총선 때여서 검찰은 그 돈이 대부분 선거자금으로 뿌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민주당 지구당 조직책들은 중앙당에서 7억∼10억원의 비공식 자금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가닥이 잡히지 않는가. 민주화를 앞세웠던 YS(김영삼) DJ(김대중) 정권 또한 정경유착의 ‘검은돈’ 관행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이 결국 권력부패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지.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은 이렇듯 ‘돈 정치’의 파국이 대를 잇고 있는데도 현 정부 역시 그것을 막을 어떤 구체적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네. ‘코드’가 맞느니 안 맞느니, ‘언론과의 전쟁’이니 뭐니 하며 야단이면서도 정작 해야 할 정치개혁은 그냥 말뿐이요, 시늉뿐이지.
한 달 전 민주당이 대선자금을 공개한다며 ‘고백성사’ 소리가 높았지만 막상 까놓고 보니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공개의 발단이 당 대표의 수뢰혐의에 있는 데다가 뻔한 ‘숫자 놀음’마저 오락가락했으니 한나라당이 모르쇠로 버텨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고는 여야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래도 되는 일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를 가장 큰 정치개혁이라고 말한다. 과거 돈과 공천권으로 여당을 손 안에 쥐고 이를 통해 국회를 지배하려 했던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개혁이다. 그러나 당정분리와 정치개혁은 별개다. 특히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한국사회 부패의 근원을 도려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 노 대통령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나 동북아 경제중심에 앞서 정치개혁을 말했어야 했다. ‘검은돈 정치’가 활개 치는 한 그 어떤 슬로건도 구호에 그치기 십상이니까.
▼공무원 특강은 그만 하고 ▼
웬만한 국회의원들은 지구당 운영에만 연간 3억∼5억원을 쓴다고 한다. 여기에 의원회관 운영비, 개인 활동비 등을 합하면 지출은 크게 불어난다. 세비(월 600만원 내외)와 후원금(선거가 없는 평년 기준 3억원 한도) 등을 합해 봐야 만성적자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파산했다는 의원은 아직 없다. 신기한 일 아닌가.
정치자금을 현실화하자고?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정치자금 한도를 올리자는 것인데 더 쓸 궁리보다 줄일 생각부터 해야 옳다. 국회의원이 ‘지역구 술상무’가 아니라면 지구당부터 없애야 한다. 문제는 정치권에 맡겨 놓아서는 아무 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여야와 거리를 둔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공무원 특강은 그만 해도 된다. 내년 총선에서도 돈이 날아다닌다면 수십 번 특강해 봐야 헛일이다. 친구, 그렇지 않은가.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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