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을 언뜻 보면 미국 유럽연합(EU) 등을 제외한 한국 일본 등 G10그룹(주요 농산물 수입국)의 입장을 꽤 받아들인 인상도 준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이번 협상의 두 축인 미국과 EU, G22(인도 중국 브라질 등 농산물 수출 개발도상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농산물 전면 개방 불가피=한국에 치명적인 초안 내용은 관세상한설정(일정 수준을 넘는 관세품목은 그 이하로 관세 인하)과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물량(TRQ) 확대.
한국은 관세가 100%를 넘는 핵심 품목이 142개나 되지만 초안은 극소수 품목에 한해 관세 상한의 예외를 인정했다. 게다가 미국은 한때 관세 상한을 25%로 낮추자고 제의한 적도 있어 큰 파장이 예상된다.
한국의 쌀 시장도 수입물량 확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초안이 개도국과 선진국에 같은 관세감축 방식을 적용하기로 한 것도 한국에는 악재(惡材)다. ‘개도국 지위’를 얻으려던 한국의 전략이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한국, 양강(兩强)에 협공당해=이번 회의에서 도하개발어젠다(DDA)협상은 미국-EU와 G22그룹이 양강 체제를 구축하고 대립하는 구도를 보였다. 여기에 한국 일본 스위스 노르웨이 등 G10그룹이 소수(少數)로서 이에 맞서고 있다.
올 8월까지도 케언스그룹(호주 뉴질랜드 등 농산물시장 전면 개방을 주장하는 17개국)을 이끄는 미국이 NTC그룹(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을 주장하는 6개국)을 주도하는 EU와 맞서는 구도였다. 그러나 NTC그룹에 소속돼 한국과 보조를 맞추던 EU가 이번 각료회의에서 미국과 손을 잡으면서 한국은 기댈 언덕을 잃었다.
미국과 손잡은 EU는 오히려 한국에 대한 개방 압력의 수위를 높였다. 파스칼 라미 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10일 각료회의 기조연설에서 “야심 찬 계획과 높은 시장개방 목표를 설정했다”며 미국-EU절충안의 수용을 촉구했다.
농산물 수출 개도국인 G22그룹의 영향력 강화도 한국에 개방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선진국들이 막대한 보조금을 자국 농민에게 줘 개도국을 가난으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내 및 수출 보조금의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협상 결렬돼도 반드시 유리하지는 않다=이번 초안에 대해 한국 일본 등 G10그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G22그룹도 추가 보조금 감축 및 철폐를 요구하며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각료회의 전체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칸쿤회의는 △농업 △비농업 △싱가포르 이슈 △개발 이슈 △기타 등 5개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이 중 한 분야만 합의를 이루지 못해도 이번 각료회의는 결렬된다. 다만 설사 이번에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다음 회의에서 한국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비농업 협상은 일부 품목의 무세화(無稅化) 조항을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이 마찰을 빚고 있으나 비교적 쉽게 협상이 진행되는 양상이다.
13일 발표된 초안을 바탕으로 각국 대표단은 심야 절충을 벌이고 있다. 농업 비농업 등 5개 분야 초안에 148개 회원국 모두가 찬성하면 이를 내용으로 하는 각료회의 선언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농산물 협상의 주요 쟁점별 각국 입장 및 각료회의 초안 비교 | ||||
쟁점 | 미국·EU | G22 | G10 | 각료회의 초안 |
관세인하 및 보조금 감축 | 선진국과 개도국에 동일한 방식 적용 | -선진국과 개도국에 서로 다른 방식 적용-선진국은 국내 및 수출 보조금 전면 철폐 | -선진국과 개도국에 다른 방식 적용-보조금 감축 반대 | -선진국과 개도국에 동일한 방식 적용-보조금 대폭 감축 |
관세상한 설정 | 찬성 | -반대, 개도국 특혜 부여 | 반대 | 관세상한 설정 |
TRQ(저율관세의무수입물량)증량 | 찬성 | -반대, 개도국 특혜 부여 | 반대 | TRQ증량 의무화 |
자료:세계무역기구, 외교통상부, 농림부 |
칸쿤(멕시코)=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한농련 “절대 수용不可”▼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폐막을 하루 앞두고 발표된 각료 선언문 초안에 대해 국내 농민단체들은 이번 초안이 한국 농업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는 만큼 정부가 수용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련)는 14일 발표한 긴급 성명서를 통해 “그동안 정부가 내건 협상 전략과 대의적 설득 작업의 결과가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며 “400만 한국 농민을 죽이는 이번 초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농련은 또 “말로만 ‘대외 공조’와 ‘농업의 다원적 기능 유지’만을 외친 정부는 이번 초안을 거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태풍 ‘매미’와 냉해로 인한 사상 최악의 흉년으로 고통 받는 400만 농민 모두가 정부 협상 대표단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농협중앙회도 이번 초안이 한국 농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별도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농협 관계자는 “한국이 속한 농산물 수입국 그룹(G10)이 힘이 약해 불리한 초안이 나온 것 같다”며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 공조를 해서 협상 조건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협상에 참가한 나라들도 겉으로는 대부분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번 초안이 앞으로 나올 최종합의안의 기본 토대라는 점을 인식하고 협상 전략 수립에 들어갔다.
미겔 호세투 브라질 농업개혁장관은 “예외 규정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좌절감을 느낀다”며 “이번 초안은 농산물 수출 개도국 22개국 그룹(G22)이 주장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 유럽 국가 당국자는 “초안 내용이 전반적으로 편향돼 있다”며 “파스칼 라미 EU 무역 담당 집행위원이 큰 숙제를 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농산물 관세 인하에서 쌀의 예외적 적용을 관철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칸쿤(멕시코)=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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