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는 나의서재]북디자이너 정병규씨

  • 입력 2003년 9월 26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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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서고에 꽂힌 책들과의 인연을 들려주고 있는 정병규 대표. 그는 책의 내용과 북 디자인의 관계에 대해 “음식은 그릇과 더불지 않으면 문화가 되지 못한다”는 비유로 설명했다.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서재에서 서고에 꽂힌 책들과의 인연을 들려주고 있는 정병규 대표. 그는 책의 내용과 북 디자인의 관계에 대해 “음식은 그릇과 더불지 않으면 문화가 되지 못한다”는 비유로 설명했다.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북디자이너 정병규씨(57·정병규디자인 대표)에겐 마음씨뿐만 아니라 맵시도 중요하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의 존재 가치를 마무리하는’ 일인 제본이나 디자인이 허투루 된 책을 보면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것은 “정보화 시대의 격랑 속에 CD롬에 맞서 한 권의 종이책이 살아남기 위해 벌여온 노력을 외면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가 책상 가까이 둔 서가에는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중후한 비평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자메이카 태생의 미술사가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의 알록달록한 ‘동물원’이 이웃해 있다.

정 대표가 8년째 쓰고 있는 작업실에 들어서자 고서점 특유의 향이 풍겼다. 40평 규모의 작업실은 모두 4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박스형 MDF 책꽂이를 블록처럼 쌓아 만든 서가가 공간을 나누는 파티션 기능을 한다. 어른이 까치발을 딛고 책을 빼낼 수 있을 정도의 높이. 73년 출판사 직원으로 책과 인연을 맺은 후 30여년간 모아온 책들이 40평 공간의 벽면을 두 번 두를 수 있을 정도로 쌓였다.

“여기엔 제가 가끔이라도 빼 보는 책들만 둔 거예요. 이 건물의 1층과 지하에 60평 규모의 서고가 있지요.”

안내 표시 없는 서재에서 길을 잃은 기자를 위해 정 대표가 관람의 하이라이트를 짚어주었다.

“이건 제가 20년간 정기구독 중인 일본의 디자인 전문지 ‘아이디어’를 모아둔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스위스의 디자인 전문지 ‘그래피스(Graphis)’가 시작됩니다. 제게 북 디자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스승이지요.”

“이건 일본의 현대사상잡지 ‘에피스테메’인데 창간 준비호라서 ‘0’호라고 돼 있어요. 70년대 초반에 푸코의 철학을 다루고 있지요. 80년대 중반에야 국내 학계에 푸코가 소개된 점을 감안하면 10년 정도의 시차를 확인할 수 있어요.”

“이 책을 보세요. 100쪽이 넘는 책장이 한 장으로 부채처럼 접혀 있어 펼치면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이 이어져 나온답니다. 350부 한정본의 몇 번째 책이더라….”

잘 만든 책은 지혜의 보고인 동시에 작업실의 멋과 품격을 높여 주는 훌륭한 ‘오브제’이다.

정 대표는 매년 한 차례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외국책 전문서점과 고서점으로 쇼핑을 간다. 원서들은 주로 책의 외양을 보고 사들이는 것이다. 읽고 싶은 책은 인터넷 서점을 이용한다. 정기 구독하는 5종의 디자인 잡지를 포함해 매년 사들이는 책은 연간 500∼600권.

“버리는 책은 한 권도 없어요. 책들마다 다 의미가 있고 또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더해가기 때문이지요. 책들과 함께 늙어가는 기분입니다. 한동안 책 만드는 일이 좋더니 지금은 보는 것이 좋아요.”

정 대표는 요즘 서재에서 기능주의적인 디자인 세계를 시각문화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문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북디자이너 정 대표에게는 맵시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중요하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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