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카사라지역의 흙과 돌이 붉은 것은 철 성분 때문이다. 흙 속 철분이 녹슬어 벌겋게 보이는 것. 포스코가 사용하는 철광석의 55%가량이 이곳에서 수입된다.
카라사 공항에서 소형버스를 타고 댐피어로 향했다. 댐피어는 철광회사 해머스리의 선적 부두가 있는 곳. 도로 옆으로 철로가 함께 달린다. 해머스리 소유의 사철(私鐵)로 광산과 부두를 잇는다. 마침 철광석을 실은 열차가 보인다. 너무 길어 몇 량인지 도무지 셀 수 없다. 동승한 이 회사의 제프 방이 말했다.
“220량입니다. 열차 길이가 2km나 되지요. 22만t의 철광석을 실을 수 있습니다. 큰 운송선 한 척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양입니다.”
댐피어에서 철광석 표본을 살펴봤다. 순도 95% 이상. 그냥 쇳덩어리였다. 물론 모든 철광석이 이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합 후 선적순도를 정확히 65%로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고순도란다. 호주인들은 큰 유산을 상속받은 부잣집 자녀인 셈이다.
호주는 철광석과 용광로용 유연탄을 포스코에 판다. 그리고 강판 자동차 배 등 철강제품을 한국에서 수입한다.
호주에는 철강회사가 없을까. 또 하나의 자원채굴기업 BHP의 퍼스 본사에서 간부들에게 물어봤다.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드니 근처 뉴캐슬에 있는 공장은 1999년 문을 닫았지요. 나머지 하나는 포트 캠브라에서 가동하고 있지만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스테드먼 엘리스 BHP 부사장)
다시 물었다. “왜 문을 닫나요? 호주가 제철업을 하면 훨씬 경쟁력이 있을 텐데….”
멋쩍은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경제발전론에 ‘퀘어타이(QWERTY)효과’라는 말이 있다.
Q-W-E-R-T-Y는 영문 타자기 자판배열 순서. 19세기에 시장을 제패한 QWERTY자판은 손가락 움직임의 효율성 측면에서 최적배열이 아니다. 그동안 타자기는 무선컴퓨터로 바뀌었지만 자판배열은 개선될 전망이 전혀 없다. 기존 자판이 QWERTY방식이기 때문에 새로 타자 배우는 사람은 이것을 배운다. 모든 사람이 이 자판을 쓰기 때문에 타자기 생산기업은 계속 QWERTY자판을 만든다. 선점자의 우위다.
비슷한 원리로 영화산업 종사자는 미국 할리우드에, 금융업 관련자는 월가에, 정보기술(IT) 전문가는 실리콘 밸리에 모여든다. 사람 자원 기술 정보가 그곳에 집중돼 있기 때문. 유리한 순환이 창출되는 것이다.
국제무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빚어진다. 인도네시아가 고무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수출하는 것은 ‘선점에 따른 고정’과 무관하다. 그러나 포스코가 철강에, 미국 보잉사가 우주항공에 비교우위를 갖는 것은 선점고정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고부가가치의 첨단기술 산업일수록 QWERTY효과가 강하다는 점. 최근 제철업이 첨단기술과 멀어지면서 QWERTY효과가 무뎌지는 추세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제강업의 주도권이 이제 중국 등 후발국으로 넘어가려 하는 것. 철광석 시장에서 중국은 한국보다 큰 고객이며 급증하는 수요로 가격을 끌어올리는 주역이다.
해머스리의 엔지니어 브루스 셔먼이 말했다.
“50년쯤 지나면 질 좋은 철광석은 바닥납니다. 이때를 대비해 저순도 광석으로 값싸게 철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광석과 함께 기술도 팔아야지요.”
서호주는 ‘QWERTY의 선순환효과’를 선점하려는 국제 각축의 현장이었다.
퍼스·카라사(호주)=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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