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신군(武信君) 항량의 죽음으로 대초(大楚) 부흥의 꿈은 끝난 걸로 알았다. 자만하기 전의 그 빈틈없는 살핌과 헤아림, 일을 꾸미고 거기 맞춰 사람을 부리는 수완, 그리고 냉정하면서도 과감한 결단력 같은 것들만이 망해버린 조국을 다시 세우고 짓밟힌 그 영광을 되살릴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 더 큰 가능성이 있다…
회왕은 항우를 성급하고 사나우며[표한] 교활하고 모질다[猾賊]하였으나 이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만 들은 탓이다. 성급함은 일의 기미(機微)에 밝아 판단이 빠른 것을 나쁘게 말한 것이며, 사나움은 그의 넘치는 힘과 드높은 패기를 시새움하는 말인 듯하다. 교활하다는 것은 그가 무장(武將)이면서도 꾀와 헤아림[計謀]을 함께 품었음을 잘못 풀이한 것이요, 모질다는 것은 큰일을 위해서는 사소한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결단력을 낮춰 본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싸움에는 타고난 감각을 지녔고, 용력(勇力)과 무예도 사람으로는 비할 이가 없을 만큼 빼어났다. 다만 망해버린 나라를 되 일으키고[復國]과 왕실을 떠받드는[勤王] 정성보다 진나라에 대한 사사로운 원한이 앞서는 게 흠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복수욕이 채워지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아직은 어두운 종횡(縱橫)과 법치(法治)의 이치도 그와 길을 함께 하는 도중에 차차 밝혀줄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그는 사납지만 길들일 수 있는 호랑이이고, 힘들지만 다듬기만 하면 하늘을 떠받들기에도 모자람 없는 큰 재목이다. 이제 나는 남은 삶을 이 새로운 가능성에 걸고 싶다. 다시 한번 힘을 다해 그를 도와 무망하게 흘러가 버린 내 칠십 평생을 보람으로 채워보겠다..........)
새벽 무렵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을 청하는 범증의 눈에는 한 줄기 눈물까지 번들거렸다.
날이 밝자 항우는 전날 다섯 갈래로 나눈 군사를 다시 크게 둘로 묶었다.
“당양군과 포장군은 종리매와 용저가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좌군(左軍)이 되어 서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으시오. 나는 중군을 이끌고 우군(右軍)이 되어 서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겠소. 북쪽에 적장 왕리(王離)가 있으나 이는 환초가 허장성세로 막고 있고, 남쪽 극원에 있는 장함은 아직 우리를 잘 모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하지만 상장군께서 이끄시는 중군(中軍)은 그 머릿수가 비록 3만이라 하나 도필리(刀筆吏=서기)와 막빈(幕賓=참모)에 시양졸(시養卒=막일꾼)따위 전투에 별 쓸모가 없는 이들을 빼면 2만을 제대로 채우지 못합니다. 그들만으로 우군을 삼는다면 좌군과 우군의 군세가 너무 차이 나지 않겠습니까?”
항량이 죽은 뒤로 범증 못지 않게 움츠러든 계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항우는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오중(吳中)에서부터 따라온 강동의 형제 8000이 있소. 그들 하나면 적병 열을 당해낼 수 있으니 나는 10만 대군을 거느린 것이나 다름없소. 걱정은 오히려 4만 밖에 안 되는 좌군(左軍)이오”
항우의 그같은 말은 전해들은 양쪽 모두를 자극하고 분기(奮起)시켰다. 강동자제(江東子弟) 8000은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항우에게 감격하여 죽음으로 싸울 각오를 다지게 되었고, 우군에 든 초나라 군사들은 항우가 자기들을 너무 작게 보는데 격동되어 전에 없는 분발을 다짐하게 되었다.
항우의 일생에 한 전기(轉機)가 되는 이른 바 ‘거록의 싸움’에서도 가장 알맹이가 되는 용도공방전(甬道攻防戰)의 두 번째 전투는 다음날 일찍부터 벌어졌다. 범증이 헤아린 대로 진나라 장수 소각과 섭간은 밤새 파발(擺撥)을 주고받아 힘을 합치기로 한 뒤, 날이 밝기 바쁘게 군사를 냈다. 전날처럼 초나라 쪽에서 용도(甬道)를 끊어 유인해낼 것도 없이 둘 모두 전군(全軍)을 들어 밀고 나왔다.
먼저 초나라 진채 앞에 이른 것은 서북쪽에서 온 소각의 군사들이었다. 밤새 공들여 정비한 까닭인지 전날 싸움에서 한바탕 크게 진 군사들 같지 않게 그 기세가 날카로웠다. 혹시라도 그리로 원군이 올까 걱정된 항우가 전날 끊어둔 두 곳 용도 안에 섶을 채우고 불을 지르게 하고 있는데, 그들 5만이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함성과 함께 초군 진채 서북쪽으로 밀려 나왔다.
좌군 진채에서 먼저 용저가 말을 놓아 뛰쳐나가는 게 보였다. 진군 쪽에서도 한 장수가 뛰쳐나왔다. 한참 동안 입씨름을 벌이던 두 장수는 곧 긴 창과 큰 칼을 휘두르며 맞붙었다. 양쪽 대군이 원진(圓陣)을 치듯 둥그렇게 둘러서서 보고 있는 가운데 한바탕 화려한 비무(比武)가 벌어졌다.
멀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용저와 맞서고 있는 진장(秦將)의 무예도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보다 못한 종리매가 다시 창을 끼고 말을 달려 나가는 게 보였다. 항우가 다시 소각의 얼굴을 안다는 군졸을 불러 물었다.
“저기 용저와 싸우고 있는 게 소각이냐?”
“멀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으나 소각은 아닙니다.”
“그럼 종리매에 맞서 달려나오는 자가 소각이냐?”
“그도 아닌 듯 합니다. 소각은 몸피가 우람한데다 수염이 희끗희끗합니다.”
“저기 수자기(帥字旗) 곁에 몰려선 진나라 장수들 중에도 소각이 없느냐?”
군졸이 다시 한번 길게 목을 빼고 싸움터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소각은 오늘 출전하지 않을 듯합니다. 수자기 바로 곁에 선 장수는 그 부장(副將) 조특(趙特)인 것 같습니다. 검은 쇠[烏鐵]로 만든 갑옷투구에 특별히 벼린 열두 자 길이의 동과(銅戈)로 알 수 있습니다. 승상 조고(趙高)의 당내(堂內)라 하여 몹시 으스대는 자입니다. 저도 공을 세워보겠답시고 소각에게 떼를 써서 오늘 싸움을 떠맡았겠지요.”
“알 수 없구나. 전군을 내보내면서 총수(總帥)가 출전하지 않다니.”
“어디 후군(後軍) 깊숙이 숨어 살피고 있겠지요. 하지만 소각은 삼갈 뿐 겁이 많은 장수는 아닙니다. 언제든 자신이 필요하다 여기면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그사이 싸움판은 양군의 혼전으로 변해갔다. 장수들끼리의 싸움이 얼른 결판이 나지 않자 진군 쪽이 머릿수만 믿고 먼저 밀고 들었다. 초군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맞받아 쳤다. 경포와 포장군이 우군을 휘몰아 나아가니 곧 10만에 가까운 대군이 거록 남쪽 벌판에서 뒤얽혔다.
“지금이다. 섭간(涉閒)이 오기 전에 적의 옆구리를 찔러 먼저 소각의 군사부터 짓밟아 놓아야겠다. 모두 싸울 채비를 하라!”
항우가 언제까지나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듯 그렇게 가만히 명을 내렸을 때였다. 계포가 동북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니됩니다. 벌써 섭간이 오고 있습니다. 역시 전군을 이끌고 온 듯합니다.”
그 말에 항우가 동북쪽을 보니 야트막한 황토언덕 너머에서 강물이 넘치듯 진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신이 이끌고 있는 우군(右軍)의 배가 넘는 군세였다. 게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아직 호된 맛을 보지 않아서인지 그 기세마저 소각의 군사들보다 사나워 보이는 점이었다. 하지만 항우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장(部將)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라.”
그렇게 영을 내려 부장들을 불러모은 항우는 무슨 어려울 것 없는 행군을 지시하기라도 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적진을 돌파한다. 적군이 진용을 갖출 틈을 주지 말고 커다란 쐐기처럼 먼저 정면을 쪼개 들어가 적을 두 토막 낸다. 그런 다음 뒤를 돌아 다시 적의 옆구리로 파고든다. 우리가 흩어지지 않고 한 번 더 적을 돌파한다면 그걸로 싸움은 끝이다. 그렇게 돌파 당해 네 토막이 난 군사는 이미 군사가 아니다. 쫓기는 들짐승이나 다름없으니 베거나 사로잡으면 그뿐이다.”
항장(項莊)을 비롯한 족제(族弟)들과 항씨에게 충성을 맹서한 오중(吳中)의 호걸들로 이루어진 부장들도 그런 항우에게서 옮았는지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각기 맡은 대오로 돌아가 명 받은 대로 사졸들을 채비시켰다.
이윽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른 섭간의 대군은 항우가 내려보고 있는 벌판에 이르러 진세를 벌이려했다. 그걸 보고 항우가 말에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가자. 입씨름은 아녀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바로 치고 들어 적을 두 토막 내어버려라!”
그리고는 스스로 거대한 쐐기의 맨 끝이 되어 앞장섰다. 섭간의 진군도 싸우러 나온 터라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았다. 궁수들은 활을 쏘아대고 사졸들은 청동 진과(秦戈)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양군 사이는 너무 가까웠고, 항우의 돌격도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상장군인 항우가 시퍼런 철극(鐵戟)을 휘두르며 앞장을 서고, 한껏 고양된 8천의 강동병(江東兵)이 목숨을 내던진 채 뒤따르니 아무리 싸울 채비를 하고 달려온 진군이라 해도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길이 없었다. 멀리 있는 군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섭간이 이끌고 온 진군은 가운데가 관통되어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대오를 잃지 않고 적진을 돌파한 항우의 군사들은 다시 우왕좌왕하는 적군의 후면을 돌아 그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쉽게 진군의 앞뒤가 두 토막 났다. 그러자 항우가 말한 것처럼 진군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두 배가 넘는 머릿수로도 마소 몰리듯 몰리기 시작했다.
섭간이 그리 무능한 장수가 아니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겁내지 말라!. 적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대오를 잃지 말고 반격하라. 달아나지 말라!”
그렇게 목이 쉬도록 외쳤으나 한번 꺾인 기세는 되살아날 줄 몰랐다. 그런 섭간에 비해 승기(勝機)를 잡은 항우의 외침은 갈수록 드높아졌다.
“모두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러자 진군 중에 마음 약한 병졸들은 벌써 무기를 내던지고 털썩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는 자들이 생겼다. 말 탄 장수들도 태반이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고, 어쩌다 맞서는 병졸들도 전세를 뒤집기보다는 달아날 틈을 엿보기에 바빴다. 그대로 가면 여지없는 항우의 승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초나라 좌군이 진군과 혼전을 벌이고 있는 벌판 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적장들을 보는 족족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며 그 우두머리 장수 섭간을 찾고 있던 항우가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새 형세를 그르쳐 좌군(左軍)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들린 함성은 그래서 기세가 오른 진나라 군사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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