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최근 노랑쥐라는 특정한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임신 기간에 먹는 음식이 자녀의 유전자를 활성화시킬 수도, 잠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노랑쥐에는 털의 색깔과 비만, 당뇨병, 암 등의 발병을 결정하는 유전자 옆에 유전자의 발현 여부를 결정하는 방아쇠와도 같은 부위가 있다. 그런데 새끼를 임신한 노랑쥐에게 비타민 등 영양보충제를 먹였더니 방아쇠가 새끼쥐 유전자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결과적으로 뚱뚱한 암컷 노랑쥐에서 보통 몸피의 갈색쥐가 태어났으며 이 새끼쥐는 날씬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새끼쥐는 암쥐와 유전자 배열은 같았다. 이는 새끼쥐의 변화가 숫쥐의 유전적 영향 때문이 아님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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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종(種)에 관계없이 임신한 동물이 먹는 음식에 따라 새끼의 질병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미국 듀크대의 랜디 지르틀 박사가 ‘분자 및 세포 생물학’ 최근호에 발표한 노랑쥐 실험 결과하면서 “최근까지 몰랐던 이유가 밝혀지고 있다”고 말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비교적 최신 학문인 ‘방아쇠 이론’(후성설)의 시금석이 될 듯하다. 방아쇠 이론은 임신부의 식사, 스트레스 등이 유전자의 배열 구조는 바꾸지 않지만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이다.
방아쇠 역할을 하는 요소들은 자녀의 심신의 성향을 결정할 뿐 아니라 암, 뇌중풍, 당뇨병, 정신분열병, 우울증 등의 질환 발병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아쇠 이론은 지금까지 과학에서 풀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 중 하나는 정신분열병이 발현하고 다른 하나는 멀쩡한가. 왜 질병을 결정하는 특정 유전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풀기 위해 방아쇠 이론 학자들은 새로운 사실에 주목했다.
가속페달 또는 제동장치의 역할을 하는 ‘메틸화(化)’라는 현상이다. 메틸화는 물질이 메틸기를 갖게 되는 반응을 말한다. 특정 유전자에 메틸기가 붙으면 기능이 활발해지기도, 잠자게 되기도 한다. 메틸기란 메탄(CH4)에서 수소 H 하나가 빠진 CH3가 붙어 있는 물질.
메틸기는 진화 과정에서 인체에 침입한 바이러스나 세균 등 ‘침입자 잔당’의 활동을 잠재우기도 한다. 이 잔당은 ‘트랜스포슨’이라고 불리는데 인체 유전자의 40%를 차지한다.
메틸기는 또 임신 전후 과정에서 부부에게서 물려받은 서로 다른 코드의 유전자가 특정 방향으로 발현하도록 하는데 이 때문에 임신 때의 음식이나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배아가 만들어질 때 정자와 난자는 각각 다른 형태로 메틸화된 유전자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자신의 코드에 따르기를 요구한다. 이처럼 수정 이후 ‘화학적 부부싸움’이 벌어질 때 외부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이때 여성이 음식이나 환경 등에 직접 반응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지므로 난자가 부부싸움에서 유리하다.
베일로 의대의 아서 보데 박사는 “우리는 유전자 배열과 여러 방아쇠들이 모자이크된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DNA 배열이 암호문에 비유된다면 방아쇠들은 글자를 만드는 프로그램 격이라고 말했다. 알파벳 문자는 26개에 불과하지만 실제 글자로 나타날 때는 다양한 크기, 글꼴, 대문자 또는 소문자, 밑줄 또는 음영에 따라 온갖 형태를 띠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
순간적으로 어떤 환경에 노출돼 메틸화가 진행되면 이것이 어떤 동물이나 사람을 평생토록 규정할 수 있다. 메틸화는 여러 요인으로 시작되지만 메틸기는 거의 전적으로 섭취하는 음식에서부터 나온다. 그래서 임신부가 먹는 음식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지르틀 박사는 털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 바로 옆에 트랜스포슨이 있는 쥐를 골라 살펴봤다. 트랜스포슨은 털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털을 노랑, 얼룩반점에 노란색, 갈색 등으로 결정한다.
지르틀 박사는 메틸화가 과도하면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아보기 위해 임신한 쥐에게 비타민 B12, 엽산, 콜린, 베타민 등을 복용케 했다. 그랬더니 메틸기가 트랜스포슨의 역할을 잠재웠고 정상적 색깔인 갈색쥐가 태어났다.
과학자들은 아직 어떤 영양소가 정확히 트랜스포슨을 잠재우는지 정확히 모른다. 지르틀 박사는 “메틸기가 풍부한 보충식품이 비만이나 암의 위험을 잠재울 수 있지만 이것이 되레 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의 역학조사는 엽산을 적게 섭취한 여성은 신경관이 결손된 아기를 출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후 미국인들은 엽산 섭취를 늘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엽산이 비만, 자폐증 증가와 관계있을지 모른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 정신의학자들은 방아쇠 역할을 하는 물질이 정신분열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캐나다 맥길대의 마이클 민니 박사는 “출생 직후 메틸화는 공포, 자신감 등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www.nytimes.com/pages/health/mutrition/index.html)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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