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참여 전문가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정치 혐오의 근본원인을 단순히 정치인의 도덕성에서 찾으려는 정치권의 해법은 대증요법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정치의 고질적 문제는 국민의 이익과 요구에 맞는 상품(정책)을 내놓지 못하는 정치권의 무능과 비효율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충고였다.
정치개혁은 저렴한 양질의 정치상품을 정치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유능한 인물을 정치시장에 진입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특히 전문가들은 무한경쟁의 글로벌 시대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치의 경쟁력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새 정부 들어 새만금 개발, 부안 위도 방사성핵폐기물처리장 건설, 이라크전 추가 파병 문제 등이 제때 해결되지 못하고 지연되는 양상은 정치권이 사실상 ‘무뇌아’적 자기실종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김용호 교수=국민 생활에 직결되고 유권자들이 ‘OK’할 만한 정치개혁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정치권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정치개혁을 논의할 때마다 정치권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만 생각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개혁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모종린 교수=한국 정치의 문제는 한마디로 ‘잘하지도 못하면서 비용은 아주 비싸게 먹힌다’는 데 있습니다. 그동안 정치개혁 논의는 부도덕한 측면에 비중을 많이 두었지만 이제부터는 무능함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대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선 국장=정치인에 대한 90년대 여론조사와 최근 조사를 비교해보니 90년대 초보다 현재가 정치에 대한 불신이 더 높습니다. 낙후된 정치 행태에 대한 불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치가 다른 분야의 상위개념이기 때문에 정치개혁 없이는 절대로 국가발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양수길 전 대사=경제운용을 하다 보면 항상 불가피하게 분배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둘러싼 집단간 사회계층간 이해갈등 문제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정치는 그러한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해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타협을 이뤄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한국 정치는 아직 그런 순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1997년 기아사태 때 4개월 이상 처리가 지연되고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원간의 갈등, 정당간 반목으로 금융개혁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자 해외에서는 ‘한국 정치권이 문제해결 능력을 잃었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외환위기는 이 때문에 왔던 것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사회 현안이 산적해 있는 데도 정치권의 외면으로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정치시스템의 실패가 계속 되면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나 동북아경제중심 구상은 웃기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이재호 위원=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정치의 본질이라는 교과서적 진리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생활에서 부닥치는 실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얼마나 내놓을 수 있느냐에 정치개혁의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임혁백 교수=소비자 중심의 정치, 수요자 중심의 정치가 민주주의 원론에 맞는 얘기입니다. 소비자 주권시대인 만큼 그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정치인들에게 주문하고 제대로 그에 맞추지 못하면 선거에 의해 퇴출시킬 수 있는 것이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여전히 소비자중심 정치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 민주화가 제대로 안됐다는 얘기죠. 여전히 공급자(정치인)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공급자가 마음대로 생산품을 만들어서 공급하고 소비자는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뜯어 고쳐야 합니다. 지역주의에 의한 지역별 일당독재현상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물론 소비자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불량상품을 공급해도 그 공급자가 계속 당선된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저질상품을 계속 공급하는 것입니다.
▽유인태 수석=우리 정치가 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보다 지역구도라고 봅니다. 지난 십수년간 우리나라에 정치가 실종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역 보스에 기반을 둔 상도동 동교동만 있었고 의회정치는 없었습니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그저 YS 대통령 만들기, 그 다음에는 DJ 대통령 만들기, 그리고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만들기에만 나섰을 뿐 정책 생산이란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구질서는 87년 양 김의 분열에 의해 지역주의가 강화되면서 유권자들의 집단적 지역이기주의로 고착돼 왔습니다. 이런 87년 체제를 깨부숴야 할 소비자들은 지금도 어떻게 하면 연고주의에 의지해 득을 볼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병폐를 어느 정도 완화하려면 지역주의를 완화할 수 있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특정 지역에서 특정 세력이 100% 싹쓸이하는 구조에서는 사익(私益)이 공익에 우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강경식 이사장=사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도 97년의 외환위기 상황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 몇 번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정부 자체가 그런 대로 사태 해결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또 적시에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97년도에 경제부총리로서 제가 답답했던 것은 당시에 그런 문제해결 능력이 완전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과는 달리 행정부가 아닌 국회와 정치권이 문제해결을 주도해야 했는데 대통령선거 때문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있음에도 이 문제는 완전히 뒷전이더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나라 경제가 망하는 것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중진도 있었습니다. 결국 정치개혁이 안 되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제가 그때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양 전 대사=최근 들어 외환위기 이전의 증상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각종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그 저변을 이루는 정치권의 행태가 안 변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에게 책임지는 정치체제, 소비자에 의해 항상 평가받고 또 잘못하는 사람은 그에 따라 즉시 퇴출되는 정치가 구축되지 못한 데서 대의(代議)정치 체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임 교수=불량 정치인을 처벌하고 단속할 책임은 사법부만이 아니라 유권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실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저질 정치인을 뽑은 지역에는 다음 총선 때까지 보궐선거를 없애서 지역대표를 일정기간 갖지 못하도록 페널티를 줘야 합니다. 소비자도 불량품을 제대로 가려내고 거부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자는 것입니다.
▽김 교수=정치권의 도덕성 문제는 87년 이후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봅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감옥에 넣을 정도니까요. 이 때문에 이제는 도덕성 못지않게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정치의 틀을 짜는 데 역량이 집중돼야 합니다. 국가의 중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자꾸 떨어지다 보면 중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 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수동적 의미의 소비자중심 정치가 아니라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정치 구조 확립이 정치개혁의 목표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리=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토론참석자(가나다순)▼
▽강경식(姜慶植)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재무부장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12, 14, 15대 국회의원
▽김용호(金容浩)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박사, 외교안보연구원 부교수, 한국정치학회 정보화추진위원장
▽모종린(牟鍾璘)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미국 스탠퍼드대 정치경제학박사, 미국 텍사스대 조교수,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
▽박효종(朴孝鍾)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미국 인디애나대 정치학박사, 경상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양수길(楊秀吉) 전 주OECD대사=미국 존스홉킨스대 경제학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NSI 자문위원.
▽유인태(柳寅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14대 국회의원, 민주당 정치연수원장, 새천년민주당 종로지구당위원장
▽이기선(李基善) 중앙선관위 홍보국장=중앙선관위 선거과장, 경기·충북도선관위 사무국장, 중앙선관위 선거연수원장
▽이재호(李載昊) 본보 논설위원=동아일보 워싱턴특파원 정치부장 국제부장 편집국부국장
▽임혁백(任爀伯) 고려대 정경학부 교수=미국 시카고대 정치학박사, 대통령직인수위 정책연구실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 국가시스템개혁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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