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기업 사냥' 견제장치

  • 입력 2003년 12월 8일 17시 14분


《토요일 밤. A회사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비밀리에 진행시켜 왔던 미국 월가의 투자자는 기습적으로 이 사실을 시장에 공표한다. 대상 회사의 경영진은 대항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나야 하는 것. 미국의 경우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런 사례는 적대적 M&A의 전형이었다. 아예 토요일 인기 TV프로그램의 이름을 따 ‘토요일 밤의 특별한 일’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 적대적 M&A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미국 정부는 적대적 M&A에 대한 대수술에 나섰다. 1968년 관련법을 개정해 ‘기업사냥’에 나설 때는 공개적으로 진행하라는 이른바 ‘5%룰’을 도입한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금강고려화학(KCC)의 현대그룹에 대한 적대적 M&A에 제동을 건 5%룰의 탄생 배경이다. 국내에선 1991년 ‘상장법인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10% 이상 취득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없어지면서 기업사냥꾼에 대한 견제장치로 도입됐다.

▽5% 룰 때문에 M&A 어렵다=5%룰이란 △특정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게 되거나 △5% 이상 보유한 뒤 1%포인트 이상의 지분 변동이 발생할 경우 5일 이내(결제일 기준 7일) 금융당국에 보고하도록 하는 규정이다. 5%면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분이라는 판단 때문. 미국의 공시의무기간이 10일인데 비해 국내 공시의무기간은 이에 못 미쳐 기존 경영진에게 유리하다.

법안의 명분은 공정한 정보공개를 통해 투명성을 높인다는 것. 기존 경영진에겐 누군가가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신호를 줘 방어할 기회를 주고 투자자에게는 ‘M&A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매도해 손해를 보지 않도록 정보를 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M&A전문회사인 ‘김앤유인베스트먼트’의 안병우 이사는 “2년 전 M&A펀드에 대해서는 10% 이상 매입 시 공시토록 하는 방안이 추진됐으나 대기업의 반대로 무산됐다”며 “적대적 M&A는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데 5%룰이 존재하는 한 사실상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소문을 내면서 진행할 경우 주가가 급등, 인수 자금에 대한 부담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 실제 최근 태광산업 등이 한빛아이앤비에 대해 적대적 M&A를 하는 과정에서 한빛아이앤비의 주가는 1만원대에서 3만원 이상으로 급등했다.

하지만 동일한 제도를 갖춘 미국에서 M&A가 비교적 활발한 것을 감안할 때 국내 시장의 문제는 제도적 측면보다는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대 법과대 김건식 교수는 “M&A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동원 능력이 중요하다”며 “미국에선 금융기관이 자금을 대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선 적대적 M&A에 대한 반감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감춰둔 우호지분’ 등 불투명하고 복잡한 지분구조도 M&A를 위한 비용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에선 국내의 경우 ‘포이즌 필’(적대적 M&A 세력을 제외한 저가의 유상증자) 등 적대적 M&A를 막는 정교한 제도가 갖춰지지 않아 오히려 M&A가 쉽다는 주장도 나온다.

▽적대적 M&A 규제해야 하나=한국에서는 아직도 적대적 M&A에 대해 ‘피땀 흘려 일군 남의 회사를 집어삼키는 기업사냥꾼’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강하다. 새로 사업을 시작해서 성공하려면 엄청난 리스크와 노력이 필요한데 기껏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 M&A를 당해버리면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업도 사고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있는 서구에서는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은 편이다. 적대적 M&A의 대상은 기업의 잠재가치에 비해 주가가 현저하게 낮은 공개 기업들. 경영진이 잘못된 경영을 하는 등으로 좋은 물건이 헐값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 때 M&A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자본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

동원증권 김세중 애널리스트는 “적대적 M&A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를 통해 저평가 기업의 주가가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는 기회가 된다”고 설명했다.

동원투신운용 이채원 자문운용실장은 “적대적 M&A를 통해 기존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고 기업의 가치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며 “제도적 완화를 통해 시장기능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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