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높은 지위이고 무거운 책임이다. 가벼운 말로 그만두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대통령은 걸핏하면 대통령을 못 해 먹겠다고 하고, 대통령직을 걸겠다고 한다. 물론 국민이 정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나 ‘나 그만둘래’ 식은 안 된다. 설령 하기 싫더라도 내색조차 하지 않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자리다.
▼10%가 대통령직 잣대인가 ▼
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는 핏대를 올릴지도 모르겠다. 거, 무슨 케케묵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대통령직도 화끈하게 걸 수 있는 ‘노짱’이 멋지지 않소. 스스로를 던져 이 썩고 병든 정치를 개혁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아니겠소.
하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는 ‘화끈하고 멋진’ 게 아니다. ‘승부수’로 걸어서는 안 되는 무한책임의 자리다.
청와대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권위주의적 국정 리더십이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으로 성격을 달리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청와대 브리핑 12월 2일자). 좋은 얘기다. 하지만 탈(脫)권위가 ‘대통령 못 해 먹겠다’까지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리더십과 1년도 안 돼 자꾸 그만두겠다는 대통령은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직설적인 ‘노무현 수사법’으로 넘길 수 있다고 치자. 측근비리에 눈앞이 캄캄해져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것도 진정성의 발로라고 하자. 그렇지만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 이상이면 물러날 용의가 있다고 한 것은 지나치게 가볍다. 설령 ‘오십보백보’와 ‘십보 백보’는 엄연히 다르거늘, 한나라당이 자꾸 ‘당신 쪽은 덜 받았느냐’며 딴죽을 걸어 분통이 터졌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할 말은 결코 아니다.
검찰의 얘기대로라면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이제 전반전을 거의 마친 상태다. 전반전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 ‘책 포장’ 등으로 500억원 정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나라당은 더 있어 봐야 ‘푼돈’이라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후반전에 드러날 노 캠프쪽 불법 대선자금은 50억원 이하라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한 386 참모(안희정)만도 이미 불법 정치자금 11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가 드러났다. 다른 측근(최도술) 역시 11억원을 챙긴 혐의로 앞서 구속됐다. 이것만도 50억원의 절반에 가깝다. 내년부터 시작될 측근비리 특검에서 다른 덩어리가 나온다면 큰 낭패다. 하기야 얼마는 불법 대선자금이고 얼마는 개인이 먹은 것이라는 식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당선축하금은 불법 대선자금과는 성격이 다르다며 따로 계산할 수도 있을 게다.
불법 대선자금액만 뽑아 보니 한나라당의 10% 미만이라고 하자. 그러면 ‘자, 10% 이하니까 대통령 계속하겠소’ 한단 말인가. 10%가 대통령직의 잣대란 말인가.
▼ ‘유치한 게임’ 그만두라 ▼
지금 이런 ‘유치한 게임’ 할 때가 아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의 세상에, 어린이들이 산타할아버지께 “우리 아빠 취직시켜 주세요”라는 편지를 보내고 있는 터에 대통령과 제1야당이 ‘불법 대선자금 누가 적게 받았나’ 내기를 한단 말인가. 국민이 기가 막혀!
아무튼 대통령이 10% 이하라고 못질을 한 이상 이제 ‘송광수 검찰’은 아무리 애써 봐야 헛일이 될 판이다. 노 캠프 대선자금은 특검이 맡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렇다면 빨리 그렇게 정리하고 국정 현안을 추슬러야 한다.
대통령이 진정 나라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정치권이 추악한 제 모습을 알기는 안다면 한 해를 이렇듯 ‘더러운 싸움’으로 접어서는 안 된다. 하다못해 국민이 새해의 희망이라도 가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대통령이 그만두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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