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은 약 20년 동안 나를 보좌해왔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서 재신임을 받겠다고 했다. 국민이 재신임을 해주지 않으면 물러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소수정권으로서 도덕성이 유일한 무기인데 그게 손상된 마당에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국민은 눈앞이 캄캄했다. 안 그래도 나라가 엉망인 판에 대통령이 덜컥 그만두면 어떡하나. 다시 대통령 선거를 한다면 도대체 누굴 뽑고 거기 들어갈 엄청난 비용은 또 어떡하나. 그래서 사람들은 재신임은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께서 제발 마음을 돌려 잡수시라고 했다.
▼누구의 ‘노 字’인가▼
상황은 그렇게 간단히 반전됐다. 서둘러 국민투표 하자고 나섰던 한나라당만 우습게 됐다. 거기서 그친 게 아니다. 최씨가 받은 SK 비자금 11억원은 부스러기였을 뿐이다. ‘큰 떡’은 한나라당의 몫이었다. LG와 현대차로부터 ‘차떼기’로 각각 150억원과 100억원, 삼성으로부터 ‘책 포장’으로 152억원, SK에서는 지하주차장에서 100억원, 합해서 무려 502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받았다니 11억원에 비할까.
세상은 들끓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석고대죄’를 하겠다고 하고, 대선 패배 후 정계에서 은퇴했던 이회창 전 후보가 나서 “내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 코너에 몰린 한나라당은 ‘노통 쪽은 덜 먹었느냐’고 외쳐댔다. 그러자 ‘노통’이 분연히 나섰다. 한나라당이 먹은 돈의 10%가 넘으면 재신임을 물을 것도 없이 하야할 용의가 있노라고.
이번에는 사람들의 눈앞이 캄캄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이 자신이 있으니까 저렇게까지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말이 그렇지 임기 1년도 안 채운 대통령이 물러날 일이야 있겠나. 그러면서 불법 대선자금 공방은 노통 쪽 받은 돈이 한나라당 쪽 먹은 돈의 10%가 되느냐, 마느냐의 ‘산수게임’으로 변질됐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이며 하야 용의는 그렇게 물 건너갔다.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질 일은 없을 듯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시 눈앞이 캄캄하다. 그렇잖아도 우울한 세밑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민주당 대변인이 ‘노 캠프가 대선 앞뒤로 돈벼락을 세 번 맞았다’고 했을 때만 해도 으레 하는 소리려니, 졸지에 야당 신세가 된 민주당이 하는 푸념이려니, 거 도술인지 봉술인지 술자(字) 돌림 사람들이 궁하던 김에 여기저기서 푼돈 좀 받아 쓴 것이려니 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도술 봉술씨는 물론 대통령의 ‘오른팔’ ‘왼팔’이라던 386참모와 국회에 나와 ‘당신들 코미디’ 하느냐며 큰소리 뻥뻥 치던 중소기업 회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측근들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채 60억원이 넘는 검은돈을 먹었다니 정말 이럴 수 있는가. 더욱이 해와 달 그룹인지 썬앤문 그룹인지가 국세청에 낼 세금 170억원을 23억원으로 줄여준 보고서 상단에 ‘노’자가 적혀 있다니 이게 대체 누구의 ‘노’자란 말인가.
▼제 몸 벤 ‘도덕성의 칼’▼
그뿐인가. 지방선거에서 쓰고 남은 돈 2억5000만원을 봉술씨에게 주라고 도술씨에게 지시한 분이 대통령이라니. 후원회장 하던 ‘선생님’ 용인땅 팔아 장수천 빚 갚은 것 다 알면서도 신문이 근거 없는 보도를 했다고 소송까지 했던 분이 대통령이라니. 측근들이 1억원 받고 3000만원 받을 때 미리 자리를 뜨거나 옆자리에 서 있었던 분이 대통령이라니. 이걸 어째, 눈앞이 캄캄하다.
과연 어쩔 것인가. 이래저래 다 합쳐서 한나라당의 10% 넘는지 마는지 다시 ‘산수게임’이나 할 텐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찌하나.
더는 고백성사란 말을 할 힘도 없다. ‘혁명’ 하자고 할 ‘시민’도 없다. 제가 휘두르던 ‘도덕성의 칼’에 제 몸을 베었거늘 누가 그걸 치료하겠는가. 누가 베인 몸을 부축하겠는가. 이렇게 한 해를 보내야 하다니, 이렇게 새해를 맞아야 하다니. 오호(嗚呼), 송구영신(送舊迎新)!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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