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좋았던 세월은 가고

  • 입력 2004년 1월 12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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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세월은 갔다. 여기저기서 청탁 받고 뇌물 먹고 온갖 지저분한 짓을 다 해도 끼리끼리 ‘방탄국회’ 열고 버젓이 의원 위세 부리던 시절이 좋았다. 수백만, 수천만원을 받아도 대가성이 없었노라고 뻗대기만 하면 넘어가던 때가 좋았다. 하기야 지금도 썩 나쁘지는 않다. 아무리 냄새가 풀풀 나는 돈이라도 ‘영수증 써 줬어’ 하면 되는 모양이니까.

세상에 불우이웃돕기라면 모를까, 단돈 만원인들 누가 거저 남을 주겠는가. 그런데도 정치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뭉텅이 돈이 술술 들어왔다니 실로 뻔뻔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랬다. 그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할 수 있는 인물일수록 계파 수장입네, 실세 정치인입네 하고 유세했다.

▼“나의 시대는 끝났다”▼

그때가 좋았다. 돈 보따리 싸 들고 당 총재든 대표든, 아니면 막후실세든 찾아가 공천만 받아내면 선거야 하나마나였던 때가 좋았다. 막대기를 꽂든 부지깽이를 꽂든 ‘당선사례’ 현수막만 준비하면 되던 때가 좋았다.

그렇게 당선만 되면 내리 서너 번은 식은 죽 먹기였다. 지구당위원장으로 자기 사람 당원으로 박아놨겠다, 때 되면 중앙에서 ‘눈먼 돈’ 내려오겠다, 심심찮게 기업에서 ‘대가성 없는 돈’ 싸들고 오겠다, 틈틈이 지역구 경조사 챙기고 가끔 지역감정에 불 지르는 말이나 잊지 않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수(選數)가 늘어나고 그럴듯한 당직이라도 맡으면 어느새 중진이요, 거물이었다. 귀찮은 입법활동이야 초재선이나 할 일이고 보스의 의중에나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하기야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모두 그랬겠는가. 그러나 국민 눈에 비친 우리 선량의 모델은 유감스럽게도 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이제 그런 모델이 활개 치던 세월은 갔으며, 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줄줄이 불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대개는 ‘후배들에게 길을 내 주겠다’는 이유지만 누구는 “나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렇다. 불출마하는 특정인을 딱히 ‘구 모델’이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그들의 시대가 끝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걸 알고 실천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다. 제3자가 보기에 ‘그의 시대’가 진즉에 끝났는데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고집하는 또 다른 ‘그들’을 보노라면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퍽이나 어려운 모양이다. 물려줄 후배도 마땅찮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런지는 모르겠으되 그들이 ‘그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다면 이제 유권자가 알게 해줄 수밖에 없다.

열린우리당이 쉰한 살의 정동영(鄭東泳) 체제로 탈바꿈한 것은 그 성공 여부를 떠나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징표다.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는 현 정권의 ‘혁명적 열정’은 분명 시대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혁명이 아니다.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이다. 그것을 이루려면 개혁주체의 도덕성과 자기 헌신, 그리고 통합노력을 통한 개혁세력의 확대가 전제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목표로 한다는 ‘대중민주주의’와 ‘강자들의 유착구조 해체’ 또한 그런 바탕에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발목 담그고 무릎 적시고 ▼

하지만 누구는 발목까지 담그고 누구는 무릎까지 적셨다고 한들, 누구는 열이고 누구는 하나만큼만 부패했다고 한들 그들이 지난 세월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대통령 386 측근들의 비극은 자신들도 건너올 수밖에 없었던 세월의 강을 망각한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 정도는 ‘부패한 주류’를 제어하기 위한 ‘비주류의 필요악’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부조리의 핵심’에 들어왔다고 너무 비장해 할 일은 아니다. 총선에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많이 시끄럽게 할 일도 아니다. 지금 절실한 것은 조용한 ‘합(合)의 비전’이다. 그래야 ‘정말 좋은 세월’을 기약할 수 있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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