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런 ‘흐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쏟아내고 있는 과학자가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학습·기억현상 연구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희섭(申喜燮·54) 박사다.
신 박사는 지난 13년간 생쥐의 뇌기능을 규명하는 데 매달려 왔다. 공포유전자와 간질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찾아냈으며, 몸의 리듬을 조절하는 생체시계를 발견하는 등의 업적을 쌓으며 세계적인 학술지에 70여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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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업적을 쌓은 배경은 그가 일생에서 2번의 ‘외도’를 감행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991년 포항공대 교수로 부임해 10년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다가 정부출연연구소로 훌쩍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전인 20대 시절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는 ‘잘나가는’ 의사직을 마다하고 실험실행을 택했다. 경제적인 대가보다는 과학적인 호기심과 연구의욕을 좇아 선택한 길이었다.
▽교수 그만두고 연구원 택해=2001년 3월 신 박사가 포항공대를 떠나 KIST로 자리를 옮긴 일은 세간의 화제였다. 정년이 대학 교수(65세)에 비해 4년 낮은 61세였고, 3년 이내에 재계약을 해야 하는 등 어느 면으로나 교수보다 불안정한 직업을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말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더군요. 연구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는데….”
신 박사가 ‘당연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공동연구의 기회였다. 포항공대 시절 “돈 없어서 연구 못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한 교류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성과를 얻으려는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다. 여러 대학 연구진과의 공동실험을 위해 생쥐를 들고 서울에 들락거렸지만 점점 힘에 부쳤다.
실제로 신 박사는 KIST에서 서울대 이화여대 경희대 등과 공동연구를 수행해 세계적인 논문을 발표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서운함도 있다. 연구비는 만족스럽게 제공되고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게 줄었기 때문. 신 박사는 “아내가 불평할 만큼 보수가 줄었다”고 말했다.
▽의사에서 기초의학자로=신 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던 시절 처음에는 임상의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의사는 환자를 보는 즐거움이 강해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의사가 단순한 직업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임상의를 포기하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의사는 현재의 환자에게 소중한 존재이지만, 기초의학 연구자는 10년 후 환자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결심이 굳어졌다.
“한마디로 행복해요. 친구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주말을 기다리며 살더군요. 돈 버는 일 따로, 즐기는 일 따로인 셈이죠. 하지만 과학자는 일 자체가 즐거운 생활이에요.”
사람은 왜 나이가 들면 치매에 걸릴까. 희로애락의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뇌 과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궁금해 하는 내용이다.
신 박사의 생활은 생쥐와 씨름하며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대답하는 나날이다. 이따금씩 참선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불가(佛家)의 수행을 실천하기도 한다.
▽과학자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최근 한국 사회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이공계를 꺼리는 이유는 뭔가. 신 박사의 답은 명쾌했다.
“과학자가 연구 잘해서 부자 됐다는 사례가 없기 때문이죠. 외국은 달라요. 예를 들어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이 하나 실리면 그 연구 성과가 곧바로 특허로 이어지고 벤처가 세워지거든요.”
그렇다면 전망은 어떨까. 신 박사는 “과거와 달리 생명과학에서 세계 수준의 업적을 내는 과학자가 많다”며 “지금처럼 정부가 육성 분야를 먼저 선정한 후 연구자를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우수한 논문을 내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집중 투자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논문이 곧바로 특허로, 벤처로 이어지는 세상이니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젊은 과학자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이런 사례가 늘어날수록 이공계 기피 현상이 당연히 사라지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실 신 박사의 연구내용도 충분히 벤처를 차릴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한 예로 그는 지난해 6월 생쥐에서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억제해 학습능력과 기억력이 향상된 ‘똑똑한 쥐’를 탄생시켰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수험생이나 치매환자에게 유용한 약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신 박사는 “비즈니스는 적성에 맞지 않아 회사 차리는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며 “하나를 알면 계속 꼬리를 물고 새로운 질문이 떠올라 다시 연구에 파묻힌다”고 말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의대 졸업자중 1%만 기초의학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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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의과대학에서도 고사(枯死) 직전인 분야가 있다. 바로 기초의학이다. 기초의학은 임상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지원자가 너무 없다.
전국의 의과대학 졸업자는 매년 3300여명. 이 가운데 1%인 20∼30명 정도만 기초의학을 택한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임상의사의 길을 선택하는 것.
2002년의 경우 전국 41개 의과대학에서 26개 대학만 1명 이상의 졸업생을 기초의학 전공자로 확보했고, 나머지 대학에서는 지원자가 1명도 없었다.
의학계에서는 지나치게 임상위주로만 발전해 온 데서 벗어나 기초의학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 의대 기초의학 교수들은 내달 중 가칭 ‘기초의학진흥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현재 의학과 하나만 있는 대학원을 의생명과학과를 비롯한 몇 개의 과로 나눠 연구 중심 대학원을 만드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조수헌 교수는 “지금의 진료나 치료에 만족하지 않고 조류독감이나 사스 같은 새로운 질병의 백신을 개발하려면 기초의학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의학상은 80% 이상 기초의학자가 수상했으며, 노벨상을 수상한 발견의 대부분이 대표적인 신약개발로 이어졌다.
생명과학의 중요한 목표는 사람의 질병을 이해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1만8000여명의 인원에 연간 30조원의 예산을 사용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사람의 질병을 중심으로 연구비를 책정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의 건강과 발달에 대한 연구 분야에 초파리, 효모 등에 관한 기초 연구도 들어가 있는 식이다.
국내 생명과학 연구는 1980년대 이후 자연계열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질병의 원인과 발병 메커니즘을 규명하려면 실제 환자를 다루는 의학계열과 공동연구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바이오기술(BT)을 핵심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자연계 생명과학자와 의사 사이에 다리를 놓을 사람이 바로 기초의학자다.
한국은 기초의학을 포함한 의약 분야 자체에 대한 투자도 아직 빈약하다. 미국은 총연구비의 34%를 의학 연구에 투자하는 반면, 우리는 총연구비의 4% 정도만 투자한다.
정부도 기초의학 분야의 중장기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2002년부터 과학기술부는 15개의 기초의과학연구센터를 선정했다. 센터당 61억원이 9년간 지원될 계획이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기자 cosmos@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신연수 경제부 차장급 기자
▽경제부=이은우 김태한 고기정 박 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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