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TV 분야의 최고 석학이자 세계적인 테크노 경영인으로 꼽히는 백우현(白禹鉉·56) LG전자 사장. LG전자의 기술담당최고책임자(CTO)인 그는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려면 이공계생들의 첨단분야 기업 진출이 더욱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눈앞의 처우 때문에 이공계 진학이나 연구직 진출을 외면하는 현실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기술을 모르고는 훌륭한 경영자가 될 수 없다”며 “미래는 기술 비전이 뚜렷한 이공계 출신 경영자들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진학, 지금이 최대 기회=백 사장은 기업인으로서 최근 이공계 우수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공계 위기 문제를 낙관하는 편이다.
“이공계 인력의 부침현상은 선진국에서도 10년 주기로 생기는 일”이라며 “국내 상황도 조만간 호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한국은 주력 업종이 전통 제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공계 인력 수급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공계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려면 인문·사회계에 비해 이공계 출신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
백 사장은 “이럴 때 이공계 학과를 지원하면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상당기간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다”며 청소년들의 이공계 진학을 적극 권유했다.
그는 자신의 경우 “어릴적 라디오 조립과 아마추어무선통신(HAM) 등으로 키운 공학에 대한 흥미가 자연스럽게 공대 진학으로 이어졌다”면서 청소년들이 전자제품 조립이나 과학서적에 관심을 가질 것을 권했다.
▽경영자로 변신한 ‘디지털TV의 아버지’=백 사장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제너럴인스트루먼트(GI) 재직 시절 디지털TV 개발을 담당하면서 이 분야 표준규격을 확립했다. 관련 특허도 30여개나 된다.
미국의 일간지 ‘USA투데이’는 1997년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디지털TV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지금도 미국의 디지털 케이블 및 위성방송의 표준으로 쓰이고 있다.
‘디지털TV 선구자상’ ‘TV 기술과학 아카데미상’ 등 미국의 각종 단체로부터 받은 상도 많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쇼(CES 2004)에서는 디지털 분야의 기술혁신을 이끈 11인으로 뽑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엔지니어로서의 백 사장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기술 분야의 풍부한 식견과 통찰력에 놀란다. 그는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사업 초기 생산성에 문제가 있는 기존 방식을 과감히 버리는 결단으로 LG전자를 이 분야 정상의 기업으로 이끌었다.
▽첨단기업 경영은 이공계의 몫=LG전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백 사장이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펼칠 수 있도록 기술담당 보직을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첨단업종일수록 기술 분야 의사결정을 총괄하는 CTO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가 지휘하는 LG전자의 연구원과 엔지니어는 2500여명. 매년 1조원이 넘는 연구개발(R&D) 투자를 직접 집행한다.
CTO에 부임한 뒤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조직 정비. R&D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R&D부터 실무사업에 이르는 과정을 통합 관할하는 프로그램매니지먼트(PMO) 기능을 도입해 디지털TV 사업을 추진했다. 중국 일본 미국 등에 연구소를 설립해 R&D 네트워크를 글로벌 무대로 넓히기도 했다.
백 사장은 “우수한 연구인력이야 말로 R&D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믿음으로 CTO 부임 후 핵심연구원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했으며 쾌적한 연구환경을 만드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공계 출신이 CTO의 단계를 넘어 CEO 자리까지 오르는 데 여전히 ‘벽’이 존재한다. 이는 아직까지 국내 기업의 이공계 출신 CEO 비율이 미국, 유럽, 일본 등에 비해 낮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백 사장은 “나는 CTO가 체질”이라면서도 “적성과 능력이 있다면 이공계 출신이라고 해서 CEO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라는 법이 없다”고 단언했다. 현재 LG전자의 CEO는 한양대 공대를 나온 김쌍수(金雙秀) 부회장이다.
▼세계는 테크노CEO 전성시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전 회장,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 인텔의 크레이그 배럿 사장, 닛산의 카를로스 곤 사장, BMW의 헬무트 판케 회장….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 최고경영자(CEO)의 공통점은? 답은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공계 출신 CEO들의 활약이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기술력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에서는 기술경영에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이공계 출신 CEO가 적임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흐름에 힘입어 각 기업에서는 기술분야를 총괄하는 기술담당최고책임자(CTO)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코닝의 로저 애커먼 회장은 세라믹을 공부한 자신의 전공을 살려 그릇을 만들던 회사를 광케이블, 광섬유, 액정표시장치(LCD)용 기판유리 등을 생산하는 첨단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중국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등 기술 관료들의 리더십을 앞세워 ‘세계의 공장’에서 ‘첨단연구소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테크노 CEO의 활약이 본격화하는 추세다.
전자업계에서는 삼성전자 윤종용(尹鍾龍) 부회장과 황창규(黃昌圭) 반도체 총괄사장, LG전자 김쌍수 부회장과 백우현 사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이용경(李容璟) KT 사장, 변대규(卞大圭) 휴맥스 사장, 윤문석(尹紋錫) 한국오라클 사장 등이 기술리더십을 갖춘 CEO로 주목받고 있다.
포스코 이구택(李龜澤) 회장과 강창오(姜昌五) 사장, 양재신(梁在信) 대우종합기계 사장 등도 이공계 출신 CEO들.
그러나 국내 기업의 이공계 CEO 비율은 미국 유럽 등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2002년 국내 상장사 CEO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25.1%로 40%를 넘는 미국 유럽에 비해 열세인 것으로 파악됐다. 신입사원 시절 업종에 따라 41∼76%에 이르는 이공계 출신의 비율은 임원으로 올라 갈수록 줄어든다. 이공계 출신자에게 임원 승진은 아직도 넘기 힘든 ‘벽’인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은환(金恩煥) 수석연구원은 “한 사람의 인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에 이공계 인력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며 “기업과 정부의 이공계 인력 비중이 계속 늘어나야 한다”고 밝혔다.
이공계 출신들이 경영학 지식과 경영마인드가 부족한 것도 CEO가 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정부와 일부 이공계 대학들은 이공계 학생들도 경제학 경영학 리더십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학과 과정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신연수 경제부 기자(차장급)
▽경제부=김태한 이은우 고기정 박 용 기자
▽사회1부=전지원 기자
▽동아사이언스=김훈기 이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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