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세영/한-칠레 FTA 마지막 기회다

  • 입력 2004년 2월 6일 18시 16분


“국회 비준에 어려움을 겪는 한국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우리 상원이 먼저 처리하겠다.”

서울의 동향을 보아가며 비준을 하겠다던 칠레 상원이 그간의 신중한 태도를 바꿔 지난달 22일 만장일치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처리한 데 대한 산티아고의 분위기다. 이쯤이면 한국의 국제적 체면은 벼랑 끝에 선 셈이다. 두 번이나 국회 비준에 실패했다. 만약 ‘9일 처리’까지 무산될 경우 한국경제의 타격은 당장의 휴대전화, 자동차 시장점유율 저하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적 신뢰 상실은 앞으로의 대외협상뿐 아니라 외국인 투자 유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9일 비준 또 무산땐 신뢰 잃어 ▼

산업구조가 서로 보완적이어서 협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쉽게 끝날 줄 알았던 한-칠레FTA가 이렇게 꼬인 데 대해 우리 모두 자성해야 한다. 1월 초 노무현 대통령이 농민단체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진작부터 했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전임 대통령은 화려한 외교적 제스처만 즐겼지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농민들과의 대화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간 두 번이나 국회 통과를 저지한 ‘농민당’ 의원들의 ‘혁혁한 전과’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단상을 점거하고 그들이 보여준 태도에 분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역겨운 정치적 쇼를 벌이면서 웃으며 국회의장을 둘러싸는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끈질기게 반발하는 농민단체의 태도에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우선, 칠레와 FTA를 하면 우리 농업이 그렇게 심각한 타격을 입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동정적이던 국민도 그간에 공부를 많이 해 가장 피해가 크다는 사과와 배를 FTA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 등을 알 정도가 됐다. 정작 상당수의 농민단체가 FTA의 불가피성을 인정했고 칠레가 쌀 고추 마늘 같은 주요 작물의 수출국도 아닌데 왜 일부 전국 규모의 농민단체들은 끝까지 반대하는가. 오히려 농민단체가 우리 농민을 위해 금년에 시급히 챙겨야 할 최우선 과제는 쌀 시장 개방 협상이 아닐까.

농촌지원 대책으로 제시한 119조원의 출처와 용도도 따져봐야 한다. 이 돈은 납세자인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금은 부자만 내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농민보다 더 어려운 영세근로자들도 낸다. 이 돈의 가치를 생각하면 정말 귀하게 농민을 위해 잘 쓰여야 한다. 혹시 과거와 같이 그 돈이 결국 농가부채로 이어지고 정부가 다시 이를 탕감해줘 또 다른 국민부담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어쩌면 지금 농민지도자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정부 지원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진짜 농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쓰도록 하는 전략 수립일 것이다.

만약 9일에도 국회 비준이 안 되면 더 이상 서두를 필요가 없다. 국제적 망신이야 어차피 당한 것이고, 상황이 그렇게 되면 그간 정부가 성급하게 내놓은 농촌지원책을 금년에 마무리해야 하는 쌀 시장 개방 문제와 연계해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

▼농촌출신 의원 '민심' 헤아려야▼

4월 총선이 끝나면 쌀 시장 개방을 놓고 정부와 농민단체가 또 한번 격돌할 것이다. 그때 가서 한-칠레 FTA와 쌀 시장 개방을 같이 놓고 ‘무엇이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한 종합대책인가’를 국민적 과제로 해서 대토론을 벌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납세자를 대변하는 단체도 꼭 참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40여명의 농촌 출신 의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낙선운동은 시민단체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량이 진정 무서워해야 할 것은 조용한 다수의 의견, 즉 민심이다. 이번에도 이들이 단상에 올라서면 한국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는 양식 있는 민심이 선거에서 등을 돌릴 것이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통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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