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노블리안스]이은우/쌀개방 전사냐…바보냐…역적이냐

  • 입력 2004년 2월 8일 17시 26분


최근 쌀 시장 개방 협상을 맡고 있는 정부 주요 당국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대뜸 “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랍니다. 하나는 ‘전사(戰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보’가 되는 것이랍니다. 꽤 인정받는 관료가 왜 죽거나 바보가 되는 길밖에 없을까요.

우선 국제 협정과 현실에 맞게 쌀 시장을 개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나중에 농민과 농촌출신 국회의원에게 ‘역적’으로 몰려 공직사회에서 매장될 수 있답니다.

그는 “쌀 시장 개방 ‘재협상’이라는 용어도 틀렸다. 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 때 이미 협상은 ‘개방’으로 결론이 났다. 개방의 원칙 하에 국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전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보’가 되는 방법은 보다 쉽습니다. 농민들에게는 “쌀 시장 개방을 막아보겠다”고 말하고 국제무대에서 “우리는 쌀 시장을 열 수 없다”고 말하면 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란 뜻이죠.

최악의 시나리오도 있습니다. 한국이 올해 주어진 여건 하에서 각국과 양자간 협상을 통해 쌀 시장 개방의 폭을 최소화했는데 내년 갑자기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타결되고, 혹시라도 우리가 이미 개방한 폭보다 작게 개방해도 되는 것입니다. 정부당국자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조금만 개방해도 되는데 많이 개방했다”며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DDA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됐으면 한국은 훨씬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WTO의 다자간 틀에서 협상하면 개방의 폭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자간 개방의 기준이 정해지면 한국은 그 수준까지만 쌀 시장을 개방해도 되고요.

작년 일부 단체가 농민을 위한다며 칸쿤에서 DDA를 반대했습니다. 이제는 DDA 협상 결렬이 한국 쌀 농업의 숨통을 더 죄고 있습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도 비슷합니다.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기자에게 “미국에 큰 소리 칠 수 있다”는 식(式)의 ‘소신파’가 협상 무대에서는 위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개방형 소규모경제’인 한국은 정말 현명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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