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안은 당초 원안에 포함된 친일행위 유형 가운데 창씨개명 관련자와 조선사편수회 관련자에 대한 2개 항목을 삭제하고 진상규명위의 활동기간도 5년에서 3년으로 축소했다.
대폭 확대된 친일파 해당자
그러나 이 법안의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규정한 점이다. 과거의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단순한 친일행위가 아니라 악질적인 부역행위자만을 처벌대상으로 했다. 36년간의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 일반 사람들은 일제와 협력하거나 협력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민법은 친일부역행위의 유형으로 한일합병 적극협력자, 일본정부 작위수여자와 일본제국회의 의원, 독립투사 고문박해자, 기타 12개 유형을 합해 모두 15개 유형의 반민족행위자를 처벌대상으로 했다. 처벌범위는 반민족행위거물급과 독립투사 고문자나 밀정 이외는 ‘악질적’ 인물 또는 친일조직의 간부급만 처벌토록 했다.
이에 비해 이번 법안은 반민족행위 유형에 10개 유형을 추가해 모두 25개 유형으로 확대했다가 법사위에서 반려된 다음 수정안에서 23개 유형으로 조정했다. 반민족행위 해당자의 범위도 대폭 하향(下向)하여 친일조직에서 일한 간부뿐 아니라 일반 직원도 해당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혔다. 즉, 일제 때 행세께나 한 사람은 모조리 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컨대 민족탄압에 앞장 선 주임관 이상의 관리, 판임관 이상의 군경과 제국주의에 협력한 군의 하사관, 읍면회의원, 학교평의회원, 사법부의 서기, 집달리, 일제의 각종 외곽단체의 평직원과 은행 회사 조합 공장 광산의 평직원까지 해당토록 했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나는 50여년전 김구 선생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구 선생은 1948년 3월 기자회견에서는 “친일파라고 해서 가혹한 규정을 내려 배제와 처단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극단의 악질자가 아니면 그들을 포섭하여 건국사업(建國事業)에 조력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애국적인 탁견이다.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후세들이, 그 때의 선인들이 겪은 건국의 어려움이나 그들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깊은 생각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친일잔재 청산은 부강한 통일국가 실현으로
이 법안의 발의자들은 친일잔재청산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에도 적잖은 문제가 있다. 조순형 민주당 대표는 이 법안이 “친일파를 가려내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정적(政敵) 타도를 위해 악용될 위험이 크다”고 반대의견을 밝혔다. 김구 선생 역시 1946년 11월 서울신문과의 회견에서 “친일분자 숙정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권형(權衡)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애증(愛憎)에 따라서 용서할 만한 자도 기어이 매장하자고만 한다”고 탄식한 적이 있다. 벌써부터 친일파 후손이라고 국회의원 4명에 대해 사직하라고 요구하는 인민재판식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사실은 이 법안이 악용될 소지가 많다는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민족정기를 살리자는 대의(大義)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또한 과거 반민특위의 활동이 미진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절차적 정당성과 실효성에 문제가 있는 ‘제2반민특위’를 정부기구로 만들어 친일파 색출작업을 다시 벌이는 일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우리로서는 일치단결하여 부강한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친일잔재 청산의 길이 아닐까. 그것은 21세기를 맞은 우리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친일파문제는 이제 사가(史家)들이 맡아 친일행위를 역사적으로 엄중하게 심판토록 하고 국난극복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 모두 머리를 식히고 심사숙고해 보자. <끝>
이동욱(전 동아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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