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저녁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한 김진표(金振杓) 전 경제부총리 등과 청와대 관저에서 한 명씩 ‘총선용 사진’을 찍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옆에 있던 유인태(柳寅泰)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농담을 던졌다.
눈도 작은 데다 평소 회의 때 유 전 수석이 툭하면 꾸벅꾸벅 졸던 것을 빗대 한 말이었다. 유 전 수석은 대통령 앞에서 졸다가 코 고는 소리를 낸 적도 있다.
‘엽기 수석’이란 별명에 걸맞게 그는 노 대통령이 신임 비서진에게 임명장을 주고 퇴임 비서진을 위로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14일 오전에도 대통령이 입장한 뒤에야 허겁지겁 뛰어들어 왔다.
자신의 이런 ‘엽기적’ 행동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의 일을 끄집어내곤 한다.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는 순간 하도 기가 차서 ‘피식’ 웃었다는 것. 더 재미있는 후일담은 방청석에 와있던 유 전 수석의 모친이 아들에게 사형이 선고된 줄도 모르고 계속 졸다가 옆에 있던 다른 피고인의 가족들이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렇게 태평이냐”고 깨웠다는 얘기. 태평스러움에 관한 한 모전자전인 셈이다.
유 전 수석은 재임 중 공식 회의석상에서 노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험한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와의 갈등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권 내에서 “정무수석이 뭐하는지 모르겠다”는 질타도 받았다.
유 전 수석은 청와대를 떠나기 직전 노 대통령에게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로 경기고 선배인 이헌재(李憲宰) 경제부총리를 삼고초려 끝에 입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
이 부총리가 한사코 ‘고사’의 뜻을 꺾지 않자 그는 7일 저녁 이 부총리와 술을 마시며 “형, 하라고 할 때 해라. 나이 더 먹으면 하라는 놈도 없다”며 특유의 입담으로 이 부총리를 압박했다. 결국 이 부총리는 “야, 오늘 같은 날 폭탄주는 왜 안 돌리느냐”며 항복을 선언했다.
‘유인태의 시대는 갔다’며 총선 불출마를 고집해 왔던 유 전 수석은 열린우리당 운동권 후배 의원들의 끈질긴 설득에 지난달 초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며 출마를 결심했다. 이후 그는 틈만 나면 후배들에게 “이게 당이냐”며 질타를 아끼지 않고 있다. 비록 정동영 의장 체제가 출범했지만 이질적 집단들이 합류한 정신적 여당 내에서 촉매제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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