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516회…셔플 X 운명의 고리(3)

  • 입력 2004년 3월 3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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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등은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 지지, 육성을 기한다.

1, 오등은 북한괴뢰 정부를 절대 반대, 타도를 기한다.

1, 오등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 분쇄를 기한다.”

나이든 죄수는 팔에 앉은 모기를 손바닥으로 탁 치고 일어나, 마른 잎처럼 가칠한 목소리로 국민보도연맹의 강령을 중얼거렸다.

“1, 오등은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 파괴 정책을 폭로, 분쇄를 기한다.

1, 오등은 민족진영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보조를 같이하여 총력 결집을 기한다.”

앉아 있을 때는 보이던 열엿새 달이 각도 때문에 숨어들고 말았다. 나이든 죄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쭈그리고 앉았다.

젊은 죄수도 달에게 들려주듯 쇠창살 밖 둥그런 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찰계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서 보도연맹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전향자들이 스스로 조직한 단체인 양 선전을 하고… 반공 웅변대회에서 큰소리로 떠들고… 동계 토벌작전(1949년 정부군이 벌인 빨치산 일소 작전) 연습에 동원되고… 그런 데다… 남하하는 인민군을 따라 아이고… 밤에 트럭으로 실려간답니다… 어젯밤 취조에서, 취조관이 불순분자 처리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불순분자… 처리… 처리….” 나이 든 죄수는 달리기 전 준비 자세를 취하듯 발목을 한쪽씩 천천히 돌렸다.

“…처형당하는 자가 곧 목격자이니, 어디서 누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겠죠. 보도연맹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한, 어느 날 형무소나 공장이나 창고로 끌려가고, 또 어느 날 트럭에 실려 끌려가고… 영원한 행방불명이 되는 겁니다… 살아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무덤에 몸을 묻을 수도 없고… ‘애국자’(보도연맹의 기관지)를 보니 보도연맹 맹원이 30만명에서 50만명에 달한다더군요”

“아이고 남로당과 민애청 운동원이 그렇게 많단 말인가? 노조나 농조 운동에 잠시라도 발을 담갔던 사람은 다 연행되고… 또 나처럼 밀고를 당해….”

“만약에 전원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왜놈들이 삼일 독립운동 때 저지른 짓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대학살입니다, 대학살….”

“아이고 36년 걸려서 겨우겨우 일제에서 해방되었나 싶더니… 5년도 채 못 돼서 동족간에 서로 싸우고 죽이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이고….”

글 유미리

번역 김난주 그림 이즈쓰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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