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오빠는 1948년 4월 9일, 김구 선생과 남북연석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해 그대로 북에 머물러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검열상에 올랐습니다. 큰 오빠는 올케 언니와 두 사내아이만 데리고 갔고, 우리 가족은 북으로 간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좌익 빨치산 네 명이 체포, 기소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집에서 쫓겨나 삼문동의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귀향하여 우리 가족에게 눈부신 빛을 선사하였던 큰오빠가 되레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을 뒤덮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들 모두 말수가 적어졌습니다. 나는 공포에 떠는 시간을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큰오빠가 준 연필을 꼭 쥐고 일기를 썼고, 한 글자 한 글자에 맹세를 담았습니다. 열여덟 살 때부터 마흔여덟 살 때까지 30년을,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와 싸운 큰오빠처럼 되겠습니다, 하고.
용봉, 봉기, 구봉 오빠는 경찰서에 연행된 후로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공산당 선언’도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도 읽은 적이 없고, 데모 행렬에 참가한 적조차 없는데, 김원봉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죠. 그 찬란했던 2월 28일에서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김원봉 장군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같은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나는 여덟 번째 오빠 덕봉과 같이 연행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들이, 이 아이는 겨우 열일곱 살, 아무것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사찰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걷어차 냈습니다.
나카노 공장은 일제 때 나카노란 일본 사람이 세운 직물공장입니다. 재봉틀과 베틀은 전부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흙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을 뿐 이불도 담요도 없습니다. 창문도 딱 하나, 문도 딱 하나. 창문과 문 앞에는 권총을 쥔 경관이 하루 스물네 시간 지키고 있습니다.
글 유미리
번역 김난주 그림 이즈쓰 히로유키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